(헬스&사이언스)4만 년 전 빙하기 인류, ‘정보’를 새겼다
독일 연구팀 구석기 기호 3000여 개 분석
정보 밀도, 원시 설형문자와 맞먹는 수준
2026-02-27 09:11:03 2026-02-27 09:11:48
“문자의 기원은 기원전 3000년경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됐다.”
교과서에서 익숙하게 접해온 이 문장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빙하기 인류가 이미 4만 년 전, 도구와 상아 조각상에 ‘의미 있는 기호 체계’를 새겨 정보를 기록했다는 가능성이 제기됐습니다.
 
독일 자를란트대학교(Saarland University)의 언어학자 크리스티안 벤츠(Christian Bentz) 교수 연구팀은 최근 구석기 시대 유물에 새겨진 점·선·십자 문양 3000여 개를 전산적으로 분석한 결과, 이 기호들이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구조적 복잡성과 정보 밀도를 지닌 ‘초기 표기 체계’였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습니다. 이 연구 결과는 이번주 국제학술지 <미 과학원 회보(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PNAS)>에 게재됐습니다.
 
가이센클뢰스테를레(Geissenklösterle) 동굴에서 발견된 약 3만 8천 년 전의 ‘경배자’ 조각상은 인형 모양의 형상과 여러 줄의 홈과 점으로 구성된 작은 상아판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표시들의 적용은 표기 체계를 암시하며, 특히 판 뒷면의 점 줄이 두드러진다.(사진=andesmuseum Württemberg)
 
반복된 점과 선, 우연 아니다
 
연구팀은 독일 남서부 슈바벤 유라(Swabian Jura) 지역 동굴에서 출토된 유물 260점에 새겨진 기하학적 기호들을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했습니다. 이 유물들은 약 3만4천~4만5천 년 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로네 계곡의 포겔헤르트(Vogelherd) 동굴에서 발견된 매머드 상아 조각상에는 십자와 점이 줄지어 반복돼 있습니다. 아흐 계곡 가이센클뢰스테를레(Geissenklösterle) 동굴에서 출토된 ‘경배자(Adorant)’ 상아상에는 인간 형상이 새겨져 있으며, 그 뒷면에는 점과 홈이 일정한 간격으로 배열돼 있습니다.
 
이 같은 반복 패턴은 다른 조각상과 도구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됩니다. 일정한 간격의 홈, 줄지어 이어진 점, 반복되는 십자 문양 등은 우연한 낙서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 연구진의 판단입니다.
 
연구의 핵심은 ‘해독’이 아니라 ‘측정’이었습니다. 연구진은 기호의 출현 빈도와 다음 기호의 예측 가능성, 반복률 등을 분석해 ‘엔트로피(정보 밀도)’를 계산했습니다. 그 결과는 5천 년 전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등장한 원시 설형문자(Proto-cuneiform)와 정보 밀도 수준이 유사하게 나타났습니다.
 
벤츠 교수는 “구석기 기호 체계는 오늘날의 문자처럼 음성 언어를 직접 표기하지는 않았다”라면서도 “반복성과 예측 가능성이라는 통계적 특징에서는 초기 설형문자와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특히 조각상에 새겨진 기호가 단순 도구보다 더 높은 정보 밀도를 보였다는 점도 주목됩니다. 이는 기호가 의례적·사회적 맥락 속에서 특정 정보를 저장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이번 연구는 문자가 어느 날 갑자기 발명된 것이 아니라, 수만 년에 걸쳐 ‘정보 인코딩’ 능력이 점진적으로 진화해 온 결과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약 4만 년 전은 현생 인류(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확산하던 시기입니다. 네안데르탈인과 공존·경쟁하던 빙하기의 혹독한 환경 속에서 집단 간 협력과 기억의 공유는 생존과 직결됐을 가능성이 큽니다. 연구진은 “이 작은 상아판과 도구들은 손바닥에 들어올 만큼 휴대가 가능하다”며 “집단 간 이동과 정보 공유에 쓰였을 수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이는 점토판에 정보를 새겨 보관하던 초기 설형문자 문화와도 흥미로운 평행선을 이룹니다.
 
이번 연구에는 통계 모델링과 기계학습 분류 알고리즘이 활용됐습니다. 이는 오늘날 대형 언어모델(LLM)이 문장 속 다음 단어를 예측하는 방식과 유사합니다. 벤츠 교수는 “이 기호들은 무작위적인 장식이 아니라 특정 정보를 저장하기 위한 의도적인 체계였다”며, “이 기호 체계에서 문자의 전신이라고 볼 수 있는 독특한 ‘통계적 지문’을 확인했다”고 밝혔습니다.
 
인간은 빙하기 동굴 벽에 점을 새기던 시절부터, 오늘날 인공지능이 처리하는 디지털 코드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기호를 통한 정보 저장’ 방식을 발전시켜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연구진이 집중 연구한 약 4만 년 전 구석기 시대 초기에 독일 남서부 슈바벤 유라(Swabian Jura) 지역에서 꽃피웠던 인류의 초기 문명인 슈바벤 오리냐크(Swabian Aurignacian)의 기하학적 문양이 새겨진 이동형 유물들.(사진=PNAS)
 
무엇 기록했는지는 미지수
 
그렇다면 이 기호들은 무엇을 의미했을까. 사냥 횟수, 계절 주기, 의례 일정, 집단 구성원 수 등 여러 가능성이 제기되지만, 아직 해독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이번 연구는 빙하기 인류가 단순히 동굴 벽에 예술을 남긴 존재가 아니었음을 시사합니다. 그들은 이미 반복과 배열, 예측 가능성을 이해하고 정보를 외부 기호에 저장하는 능력을 갖춘 ‘인지적 현대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번 연구는 유럽연구위원회(ERC)의 지원을 받은 ‘시각 정보 인코딩의 진화(EVINE)’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인류는 생각보다 훨씬 이른 시점부터 세계를 ‘읽고’, ‘새기고’, ‘기억’해 왔을지도 모릅니다. 이번 연구는 문자의 역사가 5천 년이라면, 정보 기록의 역사는 4만 년에 이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강하게 제기합니다. 
 
임삼진 객원기자 isj2020@daum.net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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