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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대통령의 깨알 같은 '강제 동원' 아전인수
(황방열의 한반도 나침반)'물컵 절반' 그대로…"망가진 한일관계 개선" 강변
2024-04-05 06:00:00 2024-04-11 10:28:34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의료 개혁 관련 '국민께 드리는 말씀'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대통령제 중심제에서는 대통령이 가장 중요합니다. 시스템은 그 다음입니다. 대통령제 국가들 중에서도 대통령 권한이 강한 우리나라는 더욱 그렇습니다. 대통령을 '나라님'으로 보는 건 시대착오지만, 이런 인식을 가진 국민이 여전히 적지 않을 정도입니다.
 
"망가진 한일 관계를 개선하려고 했을 때는 당 안팎에서 지지율 걱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연간 천만 명 가까운 양국 국민들이 상호 방문하고 있고, 양국 기업들의 협력은 활발해지고 경쟁력은 향상되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일, '의료 개혁' 주제 대국민담화 중에 한 말입니다. 의료 파업이 악화하는 가운데, 이에 대응하기 위한 담화 중에 "회피하고 싶은 인기 없는 정책도 국민에게 꼭 필요하다면, 국익에 꼭 필요하다면, 과감하게 실천하며 여기까지 왔다"며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질의응답도 없이 50분간 1만1385자를 낭독하면서, 그것도 의료 파업 문제로 담화를 하면서 깨알같이 한일 관계를 챙겼다는 점에서, 그가 여기에 각별한 자부심을 갖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일방 담화가 아니라 기자회견이었다면…
 
만약 이 무대가 기자회견 자리였다면 그래서 기자들이 질문할 수 있었다면, 틀림없이 "그래서 한일 관계가 좋아진 것이냐", "일본은 도대체 언제 '물컵의 절반'을 채울 것이냐"는 질문이 나왔을 대목입니다.
 
정부는 지난해 3월 6일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문제 해법으로 '제3자 변제안'을 발표했고, 이 자리에서 당시 박진 외교부 장관은 "물컵에 물이 절반 이상은 찼다. 앞으로 일본의 성의 있는 호응에 따라서 그 물컵은 더 채워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습니다. 박 장관은 '물컵 절반' 표현으로, 용산의 눈총을 받았다는 후문입니다. 물컵을 온전히 다 채우기 어렵다는 걸, 이미 그때 알았기 때문이겠죠.
 
윤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그 뒤 7번이나 만났습니다. 하지만 피해자 4명은 굴욕적이라며 '제3자 변제'을 거부해 버렸습니다.
 
'제3자 변제'의 치명적 약점은 피해자들의 구상권입니다. 정부는 정부안을 거부하는 피해자들의 배상금을 법원에 공탁해서 채권을 소멸시키려 했으나, 법원은 공탁 신청 12건 전체를 불수리했고, 이에 반발한 이의신청도 모두 기각했습니다. 윤 대통령은 일본 기업들에 대한 구상권을 행사하지 않겠다고 공개 약속까지 했으나, 무참하게도 구상권은 여전히 살아있는 겁니다.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포스코 등을 통해 조성한 기금도 사실상 바닥났습니다. 지난 3월 기준 기부금은 모두 41억원, 1차로 확정판결을 받은 11명에게 25억원을 지급했고, 약 16억원이 남았습니다. 정부안을 거부한 4명의 공탁금 10억여원을 제외하면, 남은 돈은 5억원뿐입니다. 여기에 최근 피해자 60여명이 또 승소했고 이 판결금만 95억원이 넘습니다.
 
대법원이 지난해 12월 강제동원 2차 판결에서 일본 기업들의 소멸시효 만료 주장을 배척한 것도 주목해야 할 대목입니다. 그동안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을 가로막아온 족쇄가 완전히 풀린 겁니다. 정부가 공식 인정한 국외 피해자들만 21만6992명(2016년 기준)으로, 1인당 1억원씩만 잡아도 21조원이 넘습니다.
 
그런데 윤석열정부의 기대와 달리, 일본 정부·전범 기업들은 기금 마련에 동참하지 않고 있고, 앞으로도 그 가능성은 극히 낮습니다. 사실 일본으로서는 물컵 절반을 채워야 할 압박도, 필요성도 느낄 이유가 없습니다. 1년째 일본 기업의 참여가 없다는 힐난에도 윤석열정부는 "우리 정부의 해법이 진전을 이루면 일본도 호응할 것"이라는, 영혼 없는 얘기만 반복할 뿐이니 말입니다.
 
윤석열-기시다 7번이나 회담했는데…기시다, 미 의회 연설에서 "과거사 반성 언급 안하기로"
 
과거사 문제는 윤 대통령이 주장하는 '한일 관계 개선' 이전보다 더 나빠졌습니다. 심각한 수준입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오는 11일(현지시각)로 예정된 미국 상·하원 합동 연설에서 과거사와 전쟁에 대한 반성을 언급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굳혔다고 일본 지지통신이 지난 3일 보도했습니다.
 
지난 2015년 4월 당시 아베 총리는 미국 의회 연설에서, 일제의 '식민지배와 침략' 등의 표현이나 분명한 사죄를 언급하지 않아 비판받았는데, 기시다 총리가 이번 연설에서 '사죄'는 물론 '과거사 반성'을 아예 언급하지 않는다면 아베 총리보다도 더 후퇴하는 겁니다. 한일 과거사 문제를 대폭 후퇴한 윤 대통령이 면죄부를 줬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요?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는 근거 없는 반일이라 표기한 일본 교과서. 한혜인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운영위원이 지난 3월 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경주이씨 화수회관에서 열린 2024 채택 일본중학교 사회과 교과서 검정 결과 긴급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뿐만이 아닙니다. 지난달 일본 문부과학성이 발표한 중학 교과서 검정결과에 따르면, 강제동원 문제와 관련해 한 중학교 교과서는 "혹독한 노동을 강요받았다"는 표현을 "혹독한 환경에서 일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수정, 강제동원의 강제성을 지웠습니다.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는 근거 없는 반일이라고 표기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것도 아닌, 한국 정부가 대폭 양보한 강제동원 문제를 이렇게 개악한 겁니다.
 
일본군 위안부와 관련해서도, '종군(從軍) 위안부'에서 '종군'을 삭제한 교과서도 있었고, 독도가 "일본의 고유 영토"라고 표시한 중학교 교과서는 전체 18종 가운데 16종으로 늘었습니다. 포괄적으로 "일제 식민지 피해보상은 한국정부의 몫"이라는 표현까지 들어갔습니다.
 
윤 대통령의 아전인수와 달리, 한일 양국 국민의 상호 방문은 코로나19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수준입니다. 또 일본은 가만히 있고 한국만 일방적으로 움직이는데 일본 기업이 협력을 원하지 않을 리가 있습니까. 일본의 수출규제에 맞서 우리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기업들이 경쟁력을 기워가고 있는 상황에는 아랑곳없이 대통령이 직접 "용인 반도체클러스터에 일본의 소부장 기업을 유치하겠다"고 나서는 판이니 말입니다.
 
윤석열정부에 들어서 중국은 한국을 '협력보다는 위기관리 대상'으로 상정하게 됐습니다. 한러 관계도 사실상 파탄 상태입니다.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3자 변제안’ 이전보다 우리는 더 안전해진 건가요? 대통령의 아전인수는 오판으로 연결되고 결국 외교 실패를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황방열 통일·외교 선임기자 hby@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신형 정치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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