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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이민이라는 과제, 낯설음은 혐오가 아니다
2023-06-27 06:00:00 2023-06-27 06:00:00
아직 터지지 않은 폭탄이다. 불씨는 도처에서 발견된다. 대구 대현동에서는 이슬람 모스크 건립을 둘러싼 갈등이 계속되고 있으며, 당장 여의도에서는 국내에 거주하는 중국인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것이 적절한지를 두고 논쟁이 펼쳐진다.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하루가 다르게 이주민에 대한 각자의 경험과 주장을 펼치는 게시물이 올라와 갑론을박의 장이 펼쳐진다.
 
우리만의 문제일까? 사실 이민을 둘러싼 갈등에 관해서는 세계 선진국들이 선배 격이다. 다문화주의를 지향하는 미국은 오랜 인종, 종교간 갈등을 겪고 있고 멕시코 국경을 둘러싼 문제는 상시적인 정치권의 논쟁 사안이다. 영국 역시 이민을 포함한 세계화 흐름에 반대하는 여론이 커지며 브렉시트를 결단한 바 있다. 동화주의 정책으로 이민자들과의 사회통합을 도모했던 프랑스의 경우도 극심한 갈등의 양상은 다르지 않다. 최근 깜짝 집권으로 전세계의 관심을 모은 이탈리아 멜로니 총리도 반이민, 반난민 정책을 내세워 당선됐다. 가히 선진국들이 이민문제로 깊은 정치적 내전에 빠져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선배’ 나라들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그들이 겪었던 시행착오를 극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낯설음’을 다루는 정치의 역량이다. 낯설음은 혐오가 아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많은 순간 겪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여기서 정치가 해야 할 일은 ‘낯설음’이라는 이민자에 대한 국민의 정서적 장벽을 이해하고 사회 구성원들이 합의할 수 있는 수준의 접점을 만드는 일이다.
 
영국의 정치평론가 데이비드 굿하트는 전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엘리트가 버린 사람들>에서 이민을 둘러싼 영국의 문제를 ‘anywhere’(애니웨어)와 ‘somewhere’(섬웨어)라는 두 세계관의 갈등으로 정의한다. 굿하트가 말하는 애니웨어는 전세계 어디서든 일할 수 있는 엘리트들이다. 주로 전문직에 종사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장소에 사는 것이 두렵지 않으며 학교는 물론 직장에서도 성공가도를 달”리는, 당연히 이민을 포함한 세계화의 흐름을 적극 환영하는 이들이다.
 
반대로 섬웨어는 대부분의 삶을 자신이 나고 자란 곳에서 보낼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이다. 주로 “중소도시나 시골출신”이며 “옛 산업도시나 해양도시 출신”도 많다. 굿하트가 말하는 평균적인 섬웨어는 “중간 소득을 벌며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취업”한 이들이고, 내수시장에 종사할 가능성이 높으며, 사회문화적으로 보수 성향인 경우가 많은, 무엇보다 “애니웨어보다 훨씬 수가 많지만 정치적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작”은 이들이다.
 
굿하트는 영국의 지난 20여 년간 주요정책이 애니웨어의 세계관을 반영해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결과 비율상 다수를 차지하는 섬웨어들의 반발이 브렉시트의 주요 원동력이 되었다고 진단한다. 중도좌파 성향의 언론인으로 평가받는 데이비드 굿하트는 책의 부제를 ‘그들이 진보에 투표하지 않는 이유’라고 달기도 했다.
 
과연 굿하트가 말하는 섬웨어들을 단순히 시대에 뒤떨어진 혐오주의자로 규정할 수 있을까? 나아가 정치의 본령이 국민의 뜻을 대의하는 일이라고 할 때, 이 다수의 목소리를 구시대적 관념으로 치부하는 것은 옳은 태도일까?
 
이민이라는 과제를 대하는 우리가 맞닥뜨려야 할 또 하나의 관문은 문화적, 종교적 이질성이다. 강력한 정교분리 원칙을 고수하는 프랑스에서도 히잡이나 부르카의 착용을 둘러싼 논쟁이 뜨겁다. 독일 또한 이를 기독교 전통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하는 여론이 제기되며 주요한 문화갈등으로 번진 바 있다.
 
우리 정치가 한발 나아가야 할 길은 이 문화적 이질성을 국민의 협의 테이블로 올리는 일이다. 그 합의의 수준에 따라 이민정책의 방향도 결정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만약 우리사회가 합의해놓은 헌법과 자유민주주의의 원칙과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요소가 있다고 판단되면 함부로 문을 열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러한 과정없이 단순히 반대하는 국민들을 인종주의자로 낙인찍거나 이민을 저출산의 대안으로 앞세우는 것은 ‘이민자를 출산 기계로 본다’는 비판에도 취약하며 저출산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보기에도 어렵다.
 
새로운 과제 앞에 관성적인 공식으로는 해법이 나오지 않는다. 임명묵 작가가 <K를 생각한다>에서 밝힌 대목은 우리가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에 대한 단초를 제공해준다.
 
“그렇기에 나는 ‘한국적 다문화’에서 모종의 희망을 본다. 소위 지식인들이나 식자들이 한국인의 배타성, 차별, 혐오에 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든 간에, 내가 관찰하고 경험한 다문화는 그와 다른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 확실한 것은 우리 사회의 지극히 상층의 세계화를 유일한 세계화라고 생각해서는 한국에서 진행되는 역동적인 민족들의 어울림과 부딪침, 그리고 다문화를 절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적 다문화가 장점을 키우고 단점을 줄이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했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한국적 다문화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가감없이 아래에서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그렇다. “아래”에서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특히 21세기 대중권력의 시대, 오만한 계몽의 시도는 여지없이 심판받기 마련이다.
 
허은아 국민의힘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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