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퍼펙트 센스
2023-06-15 06:00:00 2023-06-15 06:00:00
일상이 거의 회복되었다. 여행을 다니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마음껏 만나며 무엇보다 마스크를 벗었다.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것처럼 자유와 해방감을 만끽하고 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분명 사람들의 만면에 미소가 가득한데 낯선 무언가가 있다. 고통까지는 아니지만 충분히 불편한 이 느낌은 대체 무엇일까. 
 
사람들이 하나씩 감각을 소실해간다. 처음엔 후각이 사라지고 그 다음엔 미각이, 이후엔 청각과 시각이 차례로 사라진다. 이런 무참한 전염병으로 뒤덮인 세상은 영화 <퍼펙트 센스> 속 세상이다. 삶의 무의미함과 허무로 감정이 요동을 친 이후 갑자기 후각을 상실한 사람들은 그것에 많이 아쉬워하면서도 나머지 감각에 의존하며 재빨리 안정을 찾아간다. 미각이 사라졌을 때도 일상은 금방 회복됐다. 잠시 패닉에 빠졌다가도 후각과 미각은 삶의 근간까지 뒤흔들지는 못했다. 
 
“Life goes on.”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대사이다. 위로로도 들리고 의지로도 들리는 이 말 앞에는 ‘though’가 생략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가까스로 생을 이어가던 사람들에게 문제가 생긴다. 분노라는 감정 때문이었다. 감각을 상실하기 이전에 사람들은 특정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겪었는데, 후각 전의 ‘슬픔’과 미각 전의 ‘공포’는 공격성이 없었다. 그러나 ‘분노’는 사람들이 서로를 해치게 하는 매우 위력적인 감정이었다. 그 감정을 빠져나오자 청각이 사라졌다. 
 
“모두의 뇌에 문제가 생기니 그저 살아있다는 것의 의미에 깊이 감사하게 된다. 하지만 타인에게 다가서기 위해서는 따뜻함을 나눠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
 
청각은 측두엽과 연결된 감각인데 사람들이 따뜻함을 나눠야 한다는 본질적인 가치를 깨닫게 된 원인이 바로 뇌를 다쳐서라는 것이다. 청각을 잃은 사람들은 이제 서로의 눈빛과 체온으로만 존재를 확인하고 사랑을 나눈다. 그러다 곧 눈빛마저도 사라지고 세상은 암흑 상태가 된다. 남은 건 단 하나, 촉각뿐이다.
 
엔데믹의 선언과 함께 찾아온 낯설음은 사람들과의 대면에서 오는 불편함이었다. 지난 3년 동안 그렇게도 사람이 그리웠는데, 관계의 소중함이 각인됐는데 그것은 여전히 뇌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었던가. 줌으로 만나던 화면 너머의 얼굴이, 전화기로 듣던 목소리와 그마저도 제거된 문자로의 소통에 우리는 얼마나 길들여진 것일까. 직접 대면해 상대의 표정을 읽고 말의 톤과 제스처의 메시지를 파악하는 일이 큰 에너지를 요하는 수고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누군가는 그 ‘일’이 불필요하거나 귀찮다고도 생각했으리라. 
 
머리에 문제가 생겼을 때라야 본질을 깨우치더라는 영화의 가르침은 마지막으로 남은 촉각, 그러니까 온전히 피부로 감각할 때만이 삶의 정수를 알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그러니 사람이 사람을 대면하지 않고는 심장이 심장을 느낄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대면이 낯설어짐을 얘기하고 있다. 어쩌면 코로나19가 우리에게 남긴 진짜 고통은 지금 이 순간일지도 모른다.   
 
영화의 제목은 <퍼펙트 센스>이다. 결론을 뒤집어 다시 질문해 보자. 감독은 촉각이야말로 완벽한 감각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촉각은 우리를 속일 수 없는 유일한 감각일까? 상대의 손이 나를 부드럽게 터치할 때, 따뜻한 입김이 내 볼을 스칠 때 우리는 분명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그것조차 사라진다면 우리는 어떻게 사랑을 나눌 것인가. 촉각을 넘어서야만 답을 낼 수 있다. ‘믿음’이다. 상대가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믿음’, 나 역시 상대를 사랑하고 있음을 상대도 알 것이라는 ‘믿음’. 대면이 새삼 낯설게 다가와도 절망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에게 아직은 이 ‘믿음’이 있다는 걸 믿어서다.
 
이승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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