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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가을 단상
2021-10-12 06:00:00 2021-10-12 06:00:00
무르익는다는 것. 성숙해진다는 것. 그 두 가지 미적 가치가 여물어가고 있다. 긴장의 고비를 늦추지 않고 있다. 가을은 그런 의무를 부여받은 계절인 것 같다. 그것을 실천하느라 바삐 바삐 흘러간다. 미련을 버리지 못한 더위를 돌려보내는 것도 이 계절의 몫이고, 다가올 추위를 맞아들이는 데도 손을 빌려줘야 한다. 누님 같은 꽃 국화도 첫눈 맞을 때까지는 그 동안 저장해두었던 향기를 뿜어낼 것이다. 부지런히 사람들의 눈과 코를 유혹할 것이다.  
 
그렇게 단풍도 물들어 가고 있음을 느낀다. 곧 붉어져 만산홍엽을 실천하겠다는 다짐이 들려온다. 생각해보면, 단풍은 치열한 삶을 살아온 것에 대한 조물주의 절찬(絶讚) 같은 것이다. 일교차가 큰 햇살과 바람의 성질을 한 자 한 자 받아 적지 않았는가. 그렇게 살아온 이력이 자랑스럽다. 거부할 수 없는 과정을 통해 단련된 숙명을 고운 빛깔로 빚어낼 수밖에 없는 존재. 거기에 극한의 아름다움이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쉼 없이 달려온 삶. 그것을 아름답게 풀어내려고 제각각 안간힘을 쓰며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단풍을 닮아가는 것 같다. 가을을 닮아가는 것 같다. 그래서 가을은 사람을 무르익게 하고, 성숙하게 하는 계절인지 모른다. 예로부터 겨울을 맞이해야 하는 준비로 가장 바쁜 때가 가을이다. 수확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수확의 계절은 수확할 재료와 양으로 인해 ‘기쁘다’는 감정을 채우려는 기대감으로 설레게 한다. 하지만, 동시에 ‘바쁘다’는 뜻도 함유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풍성한 수확이라는 말은 ‘열심히 일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몫’이라는 의미도 품고 있음을 알고 있다. 가을은 부지런해져 하는 계절인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 계절에 어울리는 글자로 곡식이나 과일 등이 익은 것을 나타내는 ‘숙(熟)’자가 떠오른다. 이 한자의 부수가 불 화(?) 받침이다. 화(?)는 불을 나타내는 화(火)와 같은 뜻이다. ‘성숙(成熟)’, ‘숙고’(熟考), ‘숙독’(熟讀)과 같은 단어는 익어가는 인간으로서의 기능에 부합하여 우리의 일상에 정착한 단어가 되어버렸다. 가을 ‘추(秋)’도 벼 화(禾)에 불 화(火)가 조합된 글자. 글자만 놓고 보면, 이 두 한자 ‘숙’과 ‘추’는 ‘익혀야 할 것’, ‘익어가야 할 것’이라는 기능을 가을이 담당해야 한다는 뜻을 품고 있는 듯하다. 
 
과연 우리는 이 글자들처럼 익어가는 계절을 살아가고 있을까. 성숙한 계절을 살아가고 있을까. 하루하루 너무 바쁜 삶에 지쳐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갈대가 바람의 방향에 맞추어 춤을 추듯이, 우리는 바람의 길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보는 시간도 필요하다. 다음 시는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창작한 것.
 
단풍 이파리 하나가 떨어지면서/ 지나가던 여인의 볼에/ 살포시 달라붙습니다/ 단풍은 떨어질 때도/ 누군가에게 아름다움을 주려고 합니다
                -오석륜 「가을 수채화」 전문 『사선은 둥근 생각을 품고 있다』(2021)에 수록
 
어느 가을날, 문득 나도 단풍의 기능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단풍은 단풍나무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한다. 하지만, 떨어져도 그 아름다움이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의 품에 안길 때는 그렇다. 그 아름다움은 지속성을 갖는다. 여인의 볼을 찾아간 단풍은 사람과의 공존으로 더 빛을 발하게 되는 법. 만일 화자 속의 여인이 이 단풍잎을 주워, 책갈피에 넣어두거나, 혹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건네준다면, 단풍의 미적 가치는 진행형이다. 어쩌면 영원의 생명성을 가질 수도 있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물어볼 일이다. 나도 단풍 이파리처럼 누군가에게 아름다움을 주고 있는 존재인지. 
 
잠깐 세상 이야기로 눈을 돌려보자. 이런저런 기사들로 넘쳐난다. 미담보다는 좋지 못한 기사들이 우리들의 눈과 귀를 점령한다. 어찌하랴. 세상살이 하려면 피할 수 없는 것들이다. 여전히 코로나19로 사람들과의 단절도 명료해지고 장기화되고 있다. 그럴수록 그리움은 점점 더 커지는 계절. 그래도 이번 가을에는 무르익는다는 것. 성숙해진다는 것. 그 두 가지 미적 가치를 실천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보자. 그런 시간을 가지겠다고 다짐해보자. 또 살아야하니까. 
 
오석륜 시인/인덕대학교 비즈니스일본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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