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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칼럼)당신은 피해자입니까? 가해자입니까?
2021-06-01 07:00:00 2021-06-01 07:00:00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누는 경계는 뭘까. 어떤 의도가 누군 가해자, 또 누군 피해자로 만들까. 인간 본성 중 ‘악의’가 작용하는 것 일까. 그렇다면 그 과정에서 ‘선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다큐멘터리 ‘학교 가는 길’을 보며 든 생각이다. 
 
1980년대 초등학교 시절. 난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이기도 했다. 저학년 땐 유독 몸집이 작았다. 그래서인지 반에서 가장 덩치 큰 녀석에게 한 학년 내내 괴롭힘을 당했다. 아침마다 눈뜨면 학교 가기 싫어 몸부림쳤다. 그때처럼 학교가 싫었던 적이 없다. 오늘은 또 얼마나 괴로운 하루가 될까. 학교에서의 매 순간이 지옥이었다. 
 
고학년이 됐다. 나는 빠르게 키와 덩치가 커졌다. 반에서 함께 노는 친구(패거리)들도 생겼다. 그러자 힘(권력)이 뒤따랐다. 우린 힘을 과시하는 방법으로 약자를 괴롭히는 걸 택했다. 괴롭힘을 당하던 내가 괴롭힘을 주는 쪽에 동조하게 된 것이다. 
 
내가 피해자였을 때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가해 녀석을 흠씬 때려주는 상상을 했다. 한 손에 연필을 꼭 쥐고 수백 번도 넘게 그 녀석을 노려보며 해코지하는 상상을 했다. 그런 상상으로 학교에서의 시간을 버티고 또 버텼다. 
 
내가 가해자였을 때는 괴이하게도 별다른 기억이 없다. 가해란 그런 것이다. 별 생각 없이 괴롭히고 별 생각 없이 괴롭혔기에 기억에서조차 남지 않는다. 별 생각 없는 그 행동 때문에 피해자는 죽을 것 같은 고통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지만 말이다. 
 
성인이 돼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괴롭힘 당했던 그 친구를 만났다. 난 사과를 했고, 그 친구는 주먹 대신 웃는 얼굴로 사과를 받아들였다. 아쉬웠던 건 날 괴롭혔던 그 녀석을 지금까지 만난 적 없단 것이다. 난 그 녀석을 만나면 웃는 얼굴과 주먹 중 어떤 것을 선택할지 아직 모르겠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사회성 발달이 이뤄지는 어린 시절을 거치며 사람은 누구나 가해의 입장도 돼 보고 피해의 위치에도 서 본다. 그건 마치 역할극을 통해 인생을 배워나가는 시간과도 같다. 명백하고 당위성 있는 이유나 명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차라리 인간의 본능적 욕구인 ‘악의’와 ‘권력’을 시험해보는 것이라 여기는 게 타당하다. 물론 인간의 기본 욕구엔 부정적인 것만 존재하진 않는다. ‘선의’와 ‘이타심’이란 덕목도 있다. ‘학교 가는 길’이 해피엔딩이 된 이유다. 
 
난 가해자도 돼 보고 피해자도 돼 봤다. 어쩌면 지금도 그럴지 모르고 그건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난 이것 하나만은 분명히 안다. 내겐 악의와 선의가 공존하고 어른이 된 난 의지에 의해 악의와 선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무작정 본능적 욕구에 따르는 것보다 이성적 사고에 의한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그래서 더 궁금하다. ‘학교 가는 길’을 본 관객 반응이. ‘학교 가는 길’을 보고 어떤 감정을 느꼈느냐가 아니다.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 인지다. 그리고 앞으로 비슷한 상황이 또 발생할 때 당신은 어느 쪽을 기꺼이 선택하겠느냐고 묻고 싶다. 발달장애 자녀들 둔 아빠로서 다큐를 본 모든 비장애인 관객들에게 내가 묻고 싶은 단 한 개의 질문이다.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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