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윤영혜 기자] 우리나라 원유 수입 지형의 변화가 뚜렷해지고 있습니다. 부동의 1위였던 사우디아라비아산 원유 비중이 5년 만에 30% 선을 내준 반면, 미주산 원유는 사상 최대치를 기록하며 빈자리를 채웠습니다. 장기화하는 중동의 지정학적 위기가 정유업계의 조달선 다변화를 이끄는 모습입니다.
중동전쟁 이후 호르무즈 해협에 갇혀 있던 한국 선박 중 처음으로 해협을 빠져나온 HMM의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 '유니버설 위너'호가 지난 6월10일 원유 하역을 위해 울산 앞바다에 도착해 해상원유하역시설인 부이로 접근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5일 한국석유공사와 대한석유협회 등에 따르면 올해 1~8월 누적 기준 사우디산 원유 도입 비중은 29.90%로 집계됐습니다. 전월 누적 기준 30.91%에서 1.01%포인트 하락했습니다.
연간 기준 사우디산 원유 비중이 30% 아래로 내려간 것은 2021년 이후 처음입니다. 당시 사우디산 비중은 29.3%였습니다. 미국의 대이란 제재와 중동 정세 불안, 코로나19 팬데믹 등이 겹치며 원유 수급 불확실성이 커졌던 시기입니다.
중동산 전체 원유 비중도 낮아졌습니다. 올해 1~8월 중동산 원유 도입 비중은 61.8%입니다. 1986년 연간 기준 60.5% 이후 가장 낮은 수준입니다. 역대 연간 기준 중동산 비중이 가장 낮았던 해는 1985년으로 57.0%였습니다. 이어 2021년 59.8%, 1986년 60.5% 순입니다. 현재 추세가 이어지면 올해 연간 기준 중동산 비중도 역대 최저권에 들어설 가능성이 있습니다.
중동산 원유 의존도가 낮아진 배경에는 지정학적 불안이 있습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원유 운송 차질이 발생한 데 이어 산유국의 생산·수출 시설까지 공격받으면서 공급 불안이 커졌습니다.
사우디도 예외가 아닙니다. 홍해 우회로를 통해 수출을 이어갔지만 후티 반군의 위협이 지속됐고 동서 송유관까지 공격받으면서 수출 여건이 악화됐습니다.
지난달 10일 피격된 사우디아라비아 동서 송유관 위성사진. (사진=AFP/연합뉴스)
이에 대응해 국내 정유업계는 원유 도입선을 넓혔습니다.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한 미주산 원유가 중동산 감소분을 빠르게 메우고 있습니다.
올해 1~8월 미주산 원유 도입 비중은 26.7%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 국가별로도 미국산 원유 비중은 올해 1~4월 누적 기준 처음 20%를 넘어섰고, 8월까지 20.12%를 유지했습니다.
미주산 원유 수입이 급증한 배경에는 미국 셰일업계의 공격적인 증산 기조가 있습니다. 중동 전쟁 장기화로 국제 유가가 치솟으면서 채산성을 확보한 미국 셰일업체들이 시추 활동을 다시 대폭 확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의 단기 에너지 전망(STEO)에 따르면, 올해 미국의 원유 생산량은 하루 평균 1380만 배럴(b/d)에 달해 이전 최고 기록(2025년 약 1370만 배럴)을 넘어설 것으로 관측됩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산 원유도 늘었습니다. 올해 1~8월 아시아산 비중은 5.9%, 아프리카산은 5.6%였습니다. 지난해 각각 5.0%, 2.2%에서 상승한 수치입니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국내 정유 설비가 대부분 중동산 고유황유 처리에 최적화돼 있어 수입처를 바꾸는 게 쉽지 않지만 최근 지정학적 위기가 상시화되면서 내부 비상 플랜이 가동된 상태”라며 “물류비 부담을 안고서라도 미국산 경질유나 아시아 틈새 물량을 선제적으로 확보해 리스크를 분산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윤영혜 기자 yyh@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