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병호 기자] 문재인정부 출범 후 가장 자주 듣는 정책 구호가 있다. '포용국가'다. 정부 발표대로라면 포용국가란 '국가가 국민의 생애주기 전체에 걸친 삶을 책임지고, 공정한 기회와 정의로운 결과가 보장될 수 있도록 하며, 미래를 혁신하는 나라'로 요약된다. 하지만 이걸로는 포용국가의 가치관과 목표를 다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포용국가는 자칫 복지국가를 달성하려는 전략처럼 오해되기도 한다. 현재까지 포용국가라는 제목을 달고 발표된 정부 정책도 다소 복지체계 강화에 방점이 찍힌 게 사실이다. '포용국가론' 정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임채원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는 "포용국가는 복지국가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그보다는 "개인과 공동체의 역량을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세계 평화주의를 제창하는 국가 대개조 비전"이라고 강조했다. (편집자)
임채원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는 지난 2월20일부터 열흘간 유럽을 방문했다. 영국과 프랑스, 벨기에 등에서 국제연합 관련 기구, 연구소, 학교 등을 둘러봤다. 임 교수에 따르면 한국이 이제야 포용국가를 주창한 것과 달리 유럽과 미국 등은 2008년 금융위기를 계기로 진작 포용적 성장에 눈을 돌렸다. 임 교수는 "당시 유럽 등에선 경제적 불평등과 차별 등을 뜻하는 '배제(Exclusion)'라는 말의 대칭어로써 '포용적 자본주의(Inclusive Capitalism)'를 새 국가 담론으로 제시했다"라고 말했다.
왜 지금 포용국가일까?
한국도 2008년 금융위기에 직간접 영향을 받았는데, 왜 10여년이 지나서야 포용국가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일까. 임 교수에 따르면 국가 미래전략을 새로 고민해야 할 격변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간 한국사회의 흐름은 임 교수가 포용국가론에 천착하게 된 과정으로 반추할 수 있다. 그는 원래 대학에서 종교학을 전공했다. 신화학을 공부하고 싶었으나 80년대를 거치면서는 자연스레 사회운동에 이끌렸다. 한국사회가 '87년 체제'로 일단 제도적 민주주의가 확보된 후에는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지 모색하다 행정학을 공부하게 됐다. 그리고 대안으로 주목하게 된 게 시민의 정치참여 확대, 시민적 공화주의다.
임채원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 사진/뉴스토마토
이론과 달리 한국에서 시민적 공화주의가 본격 태동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등 간헐적 시민운동도 있었지만 열망이 확산되지 않았다. 그가 바란 시민적 공화주의는 2016년 촛불혁명을 통해 개화했다. 2016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매주 토요일마다 광화문광장 등에선 연인원 1700만명이 자발적으로 모였다. 임 교수는 "문재인정부는 촛불혁명으로 탄생했고, 한국사회에 누적된 과제들을 해결하라는 게 촛불시민의 요청"이라고 밝혔다.
과제 중 가장 중요하며 시급한 게 '삶의 질' 개선이다. 한국은 해방 후 고도성장을 했지만 정작 개인의 삶은 피폐해졌다. 임 교수는 "한국에선 결혼을 마냥 미루거나 자녀를 안 갖겠다는 청년들이 늘고 있다"면서 "그런 결정은 단순히 선택의 문제가 아닌 삶의 압박감 때문이고, 시민들은 이런 상황에 놓인 국가가 '지속가능할 수 있겠느냐'는 물음을 제기했다"고 전했다. 국가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할 대안으로 도출된 게 바로 '포용국가'라는 얘기다. 임 교수는 "촛불혁명은 한국사회가 경제발전을 넘어 시민사회로 나아가는 큰 전환점"이라면서 "그 시민적 열기를 국가 담론으로 제시한 게 포용국가"라고 강조했다.
"포용국가 위해선 정치혁신 필요"
임 교수에 따르면 국내에선 포용국가가 '퍼주기'라고 비판받지만 해외 반응은 다르다. 그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등에 가면 한국의 포용국가론에 관심이 많다"면서 "한국처럼 개혁 과제들을 포용국가라는 이름으로 의제화하고 국가론으로 만드는 곳이 없다"고 설명했다. 포용국가가 복지국가의 아류로 왜곡되는 건 정부 정책이 복지에 집중된 탓이라는 지적이다. 그는 "포용국가는 개인과 기업, 지역, 정부, 공동체 등의 역량을 강화, 자생·협력할 수 있는 생태계를 조성하고 그런 방향으로 나라를 개조하자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역량강화를 위해 개인과 기업, 공동체 등에 투자를 늘리고 생산성을 높이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하는데 복지나 소득주도성장은 그 방법의 하나일 뿐이란 말이다.
2017년 5월11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제2차 성공적인 통합정부를 위한 제안서 정책편 발간을 위한 공개토론회'가 열렸다. 임채원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도 토론자로 참석했다. 사진/뉴시스
포용국가 방법론을 거론하며 임 교수는 정부·정치혁신도 짚었다. 그는 "포용국가를 장기간 추진하려면 이를 실행할 정부와 정치도 혁신돼야 한다"면서 "포용국가를 정부와 집권여당만의 의제가 아닌 여야가 공동 추진할 담론으로 합의하는 정치혁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 "분절화와 능률성 우선, 경쟁, 시장화, 성과주의 등의 부작용을 해소하는 정부혁신도 모색돼야 한다"며 "시민참여 정신을 되살려 대의 민주주의에 직접 민주주의 요소를 첨가하는 것도 대안"이라고 말했다.
역량강화에 중점을 둔 포용국가는 단일 정권 임기 내 이뤄질 일이 아니다. 임 교수가 정부·정치혁신을 주장한 것도 이런 이유다. 그는 문재인정부 출범 때 국정기획자문위원회에 참여한 후 현재는 대통령직속 정책기획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며 100대 국정과제 실행계획 마련에 힘을 보태고 있다. 그렇지만 "포용국가 내용이 광범위해 현 정부 임기 안에 다 소화하지 못할 수 있다"면서 "2050년 달성을 목표로 해야 한다"라고 전했다.
"분단된 한국이 세계평화 주창 적임자"
포용국가를 통해 세계에 평화 담론도 던질 수 있다. 임 교수는 "'포용'이 한국말로는 '너그럽게 감싸다'라는 뜻이지만 원래 영어로는 'Inclusive'라고 써서 '포괄하다, 경계를 허물다'라는 의미"라면서 "포용국가의 의의를 넓히면 '다른 나라와 경계를 짓지 않고 상호협력한다'는 생각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포용국가는 한국을 세계평화의 중심국으로 만드는 비전이기도 하다"면서 "한반도를 포용해 남북 긴장관계를 완화하고, 세계를 포용해서는 패권경쟁이 대신 평화체제로 나가자고 주창할 수 있다"고 밝혔다. 지난 2월25일 문재인 대통령의 '신한반도체제 선언'도 포용국가의 세계 평화주의 맥락에서 탄생한 아젠다라는 설명이다.
2월27일 임채원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가 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세계문화유산(유네스코)을 방문했다. 임 교수는 2050년 포용국가 달성을 위한 전략 중 하나로 서울 용산에 유엔 사무소를 유치, '용산 유엔시티' 조성하자고 주장했다. 사진/임채원 교수
임 교수는 "가까운 100년만 살펴봐도 제 1·2차 세계대전을 겪었고, 냉전에 이어 지금은 미국과 중국의 글로벌 패권경쟁이 심화되고 있다"면서 "세계 각국이 모두 이런 각축에 피로도가 심하지만, 자국의 이익을 우선하다 보니 경쟁 틈바구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악순환이 반복된다"라고 분석했다. 이어 "세계 평화를 누가 주장할 수 있을까? 미국도 중국도 일본도 아닌 과거 열강의 침탈을 받았고 지금은 남북으로 분단된 한국이 적임자"라고 역설했다. 임 교수는 2050년 포용국가 달성을 위한 전략에서 '용산 유엔시티' 조성을 제시했다. 그는 "지난 100년간 청나라-일본-미국 등 외국군이 주둔한 서울 용산에 유엔 사무소를 유치, 유엔시티로 삼고 세계 평화주의 의제를 주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임 교수는 한국의 역사는 물론 국제 위상을 고려할 때 유엔시티 조성과 평화주의 담론이 마냥 불가능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해 한국의 세계 GDP 경제순위는 12위로, 주변에 중국이나 일본, 러시아 등 강대국이 많아 존재감이 적을 뿐이지 사실은 세계에서 주목도가 높은 국가 중 하나"라며 "정부가 자신감을 갖고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해 담대하게 세계평화를 주창한다면 다른 나라들도 동조할 것"이라고 말했다. 임 교수는 올해 상반기 용산 시민들과 함께 유엔 사무소 유치를 위한 서명운동을 진행할 예정이다.
최병호 기자 choibh@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