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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60화)바다가 목격한 시간들
“아버지의 저승과 / 자식의 이승 파도쳐 가까워져라”
2017-04-03 08:00:00 2017-04-03 08:00:00
이슬람 무장세력 IS의 점령지역인 이라크 모술을 탈환하려고 미국 주도의 동맹군이 공습과 폭격을 가해 수백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고 한다. 황당한 사실은, 이 ‘오폭’에 앞서 이라크 당국이 주민들에게 대피하지 말고 집안에 그대로 있으라고 수차례 지시했다는 것이다. 탈출시켜야 할 승객들에게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있으라는 방송을 반복한 세월호의 상황과 어찌 그리 닮았을까. 또한, 1950년 6월27일 새벽, 전쟁 발발 이틀 만에 가장 먼저 피난을 간 이승만 대통령이 그날 밤 서울시민들에게 안심하고 서울에 있으라는 방송을 세 차례나 내보낸 후 다음날 한강의 다리들을 폭파한 것과도 참으로 닮아 있다.
 
반복되는 비극
3년 만에 인양된 세월호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심정은 착잡하기 그지없다. 하물며 유가족들의 심정이야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그런데, 2014년 4월16일 304명을 희생시킨 세월호 참사의 그날로부터 44년 전 닮은꼴의 참사가 있었다는 사실에는 말문이 막히게 된다.

1970년 12월15일 새벽 1시15분, 서귀포와 부산을 오가던 정기여객선 남영호가 여수 앞바다에서 침몰해 323명이 희생되었다(해난심판원 자료 기준. 남제주군의 조난 수습일지 상으로는 326명). 세월호 희생자들의 다수가 안산 단원고 학생들이었듯이, 남영호 희생자들의 다수는 제주도민들이었다. 세월호와 다를 바 없이, 승객들에 대한 탈출 지시는 전혀 없었다. 과적, 선박 불법 개조도 동일하다. 허가된 적재량을 훨씬 뛰어넘는 화물 과적의 일상화, 선주와 권력층의 유착, 정부의 무책임한 사고대처방식도 세월호와 닮은꼴이었다.

사고 직후 남영호가 타전한 긴급구조신호(SOS)를 수신한 것은 일본 어선이었고, 이들이 사고를 일본 순시함에 알려 그를 통해 조난 사실이 한국에 전해졌다고 한다. ‘긴급사태 발생’을 알리는 일본 측의 타전에도 응답이 없던 한국 해경은 사고 발생 14시간 만에 현장에 도착해 3명을 구조했는데 이는 일본 선박이 8명을 구하고 민간 어선이 1명을 구조한 뒤였다고 하니, 44년이 지난 세월호 참사의 현장에서 이루어진 민간어선들의 구조작업과 민간잠수사들의 목숨을 건 수색작업을 기억하는 국민들로서는 한숨을 지으며 다음과 같이 자문할 수밖에 없다. 왜 한국사회에는 44년이 지나도 같은 방식의 비극이 되풀이되는가?

당시 정부는 사고 후 열흘도 채 못 되어 시신·선체의 인양을 포기하고 12월28일 서귀포에서 시신 없는 합동위령제를 지내 유족들의 분노를 샀다. 언론의 보도에 의하면, 1971년 3월 서귀포항 귀퉁이에 남영호 사고 희생자 위령탑이 건립되었으나 80년대 들어 항만 확장 공사로 인해 중산간 일대(서귀포시 상효동)로 옮겨져 방치된 것을 당시 <한라불교신문> 기자였던 조인석씨(현 춘강어울림터 원장)가 수풀 속에서 찾아내 약 20년 동안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리고 2014년 12월15일, 서귀포시 정방폭포 인근, 바다가 보이는 곳에 ‘남영호 조난자 위령탑’이 새로이 세워졌다. 부산지역 희생자들도 적지 않았으나 희생자의 다수를 점한 제주도민의 경우, 4·3항쟁의 희생자 가족들이 다시 남영호 참사의 희생자 가족들이 되는 통한의 역사를 되풀이하게 된다. 남영호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곳은 남해이고 고은 시인은 고향 군산의 앞바다 즉 서해를 보고 자랐지만, <만인보>에는 이 바다 저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여럿 담겨 있다.
 
서해바다는 영 바다 같지 않아요
헛기침도 하는
삼이웃사람 같아요 이웃집 같아요
무거운 날
연기 다 나간 뒤에도
연기냄새 남아 있는 이웃집 마당 같아요
 
그런 바다에서 못 돌아오다니
 
< … >
(‘일만이 아버지’, 1권)
 
1일 전라남도 목포시 목포신항 앞 주변 노란 리본이 매달린 철제 울타리 사이로 시민들이 세월호 선체를 보고 있다. 사진/필자 제공
 
김대중 납치사건
1970년 남영호 참사를 목격해야 했던 바다는 1973년 희대의 정치공작 납치극을 목격하게 된다. 1969년 삼선개헌을 통해 다시 대통령 선거 후보로 나선 박정희는 1971년 관권·부정선거 의혹에도 불구하고 적은 표차로 간신히 김대중 신민당 후보를 이기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당시 김대중 후보에게는 이런저런 사고들이 발생했는데, 그가 다리를 절게 된 것도 이즈음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해 다쳤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2년 10월17일 박정희에 의해 비상계엄령과 함께 유신이 선포되고 국내의 정치상황이 더욱 암울해지자, 김대중은 미국과 일본을 활동무대로 반유신 민주화운동을 벌이기로 결심한다. 유신 당시 일본에 머물던 그는 1973년 7월6일 미국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 발기인대회를 마친 뒤 7월10일 일본으로 돌아와 한민통 일본본부 결성을 추진한다.
 
그러나 1973년 8월8일 반(反)박정희 집회의 참가를 위해 도쿄의 그랜드팰리스호텔에 투숙 중이던 김대중은 이후락이 지휘하는 중앙정보부와 주일한국대사관의 공작에 의해 전격 납치되고 말았다. 오사카로 옮겨진 그는 중앙정보부의 공작선인 용금호에 태워져 대한해협을 건너게 된다.
 
고난이 필요한 시대 그는 고난의 과녁이었다
 
일본 수도의 한 호텔 안에서
토막져 죽어야 했다가 살아났다
현해탄 복판에 던져져
물귀신이 되어야 했다가 살아났다
 
71년 대통령선거에서
아슬아슬하게 졌다
그의 파도치는 웅변이
백만 인파를 지진처럼 흔들어댔다
그는 혼자서도
백만 인파였다
 
그로부터 박정희는 치 떨었다
 
70년대 전기간 그는
그 극한의 고난 가운데서도
밤새워 책 읽고 영어 개인교사를 드나들게 했다
 
모든 준비를 다 마쳤다
친지와 의논할 때도
라디오 FM 틀어놓고
도청을 막아가며
모든 준비를 다 마쳤다
하지만 오직 하나
그가 바라는 것 대통령이 되는 것만이
아직도 그의 것이 아니었다
 
박정희 뒤의 어떤 고비에도
그는 삶을 겨자씨만치도 허비하지 않았다
< … >
(‘김대중’, 10권)
 
<만인보> 10권의 초판이 간행된 것이 1996년이니 이 시가 쓰일 당시 아직 대통령이 되지 못했던 시의 주인공은 “겨자씨만치도 허비하지 않”은 삶으로 그 얼마 후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이 되었다. 김대중의 납치를 박정희가 지시했다는 것이 공식적으로 입증되지는 않았으나, 이 사건이 결국은 자신에게 눈엣가시 같았던 야당 지도자를 없애버리고 싶어 한 박정희의 의도에서 비롯되고 그의 승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임에는 의심할 나위가 없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증언에 의하면, 배를 탈 때 납치범들이 그의 다리에 무게추를 달았다고 한다. 또한 비행기 소리를 들었다고도 증언했는데, 이상을 종합하면, 그가 바다에 수장될 위험에 처했을 때 납치사실을 알게 된 미국과 일본 중 한 측의 비행기가 출현했을 것이라는 설이다. 미국 측 증언으로는 그들이 비행기를 띄우지는 않았고 청와대에 가서 박정희에게 김대중을 풀어주라 했다는 말이 있다.
 
관련자들의 증언이 상이하고 기록들도 진실을 규명하지 못해 여러 설들이 분분하지만, 분명한 것은, 테이프로 눈을 가리고 손발을 묶고 입에 재갈을 물려 정보부 공작선의 화물창에 야당 지도자를 감금해 바다를 건너는, 조직폭력배 영화에나 나올법한 희대의 납치극이 박정희 정권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사실이다. 살해에 실패하고 김대중을 동교동 자택에 풀어줄 수밖에 없었던 박정희는 사건 무마를 위해 일본 총리에게 사과를 보내고 4억엔의 정치자금을 전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 공포의 납치극을 겪은 피해자가 대통령이던 시절에도 진실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못했으니, 그날들의 진실은 그 시간을 목격한 어두운 밤바다에 아직도 흩어진 채로 남아 있다.
 
바다가 목격한 삶과 역사
바다는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재(人災)에 의해 수백 명을 잃은 세월호와 남영호 참사를 겪었고 정치권력에 눈먼 자들이 저지른 테러 납치사건도 겪었다. 이제, 바다가 목격한 시간, 그 시간의 진실들이 하루 빨리 밝혀져 역사 속에 제대로 자리하기를. 바다 속에 잠겼다 솟아나온 저 처참한 배의 모습이 진실을 말해주고 역사를 기록하기를.
 
그러나 바다가 기록하는 역사는 사회적 차원의 참사나 정치적 차원의 사건뿐만 아니라 매일의 삶을 살아가는 바닷사람들 각각의 일상이기도 하다. 여기에 그 모습을 두 편 전한다.
 
제주 함덕 뱃사람 김기호는
삼촌 종흥과 함께
갈칫배 타고 나섰다
폭풍 만나 배 뒤집혀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아내 백씨
해녀 동무를 풀어서
남편 시체 찾아나섰으나
여드레 동안 난바다 밑 다 뒤졌으나
허탕치고
스님 청해다 용왕기도 드렸으나
허탕치고
스물다섯에 과부 되어버린 백씨
저 스스로 목욕재계하고
바닷속으로
바닷속으로 가서
바다 밑 어느 돌틈에 끼여 있는
남편 김기호의 시체
고기들이 뜯어먹다가 만 것이나마 기어이 찾아내어
품어 안고 솟아올랐다
< … >
아침에 가 무덤 앞에서
오늘 할 일 이것저것 여쭙고
저녁에 가 오늘 한 일 못한 일 낱낱이 여쭙고
집으로 돌아와
아들 하나 둔 것 길러
따온 생미역 먹여 길러
남편으로 두둥실 섬기며 살았다
오 저녁 큰 밀물 때
땅보다 드높은 검은 바다 물보라 속 거기
들리느니 남편의 소리
파도소리
(‘함덕리 백씨’, 2권)
 
바다 밑은 하도 고요하여라
바다 위는 하도 하도
파도쳐
빈터 없어라
 
간밤 오징어배 한 척 꿀꺽 삼켰어라
흔적 없어라
동해 대화퇴 바다
어디에도 끝없어라
 
이승의 주문진 벼랑 밑
다닥다닥
막집들
 
어머니는 집을 나가고
바다로 나간 아버지
혼자서 기다리는 자식
< … >
옷 입은 채 잠들어 있다
 
부엌이래야 가마니때기 드리운 가장자리
살강도 없이
수저 셋
양재기 넷
부뚜막에 늘 놓여 있어라
 
바람 불어라
바람 불어라
바람이라도 불어라
아버지의 저승과
자식의 이승 파도쳐 가까워져라
(‘어부 피용구의 저승’, 19권)
 
세월호 미수습자 허다윤양의 아버지 허흥환씨가 1일 전남 목포신항에 거치된 세월호를 바라보고 있다. 사진/뉴시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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