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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26화)“돌고 돌다가 이제야 왔네”
길 위의 삶, 부보상(負褓商)
2016-07-18 06:00:00 2016-07-18 06:00:00
‘장돌뱅이(메밀꽃 필 무렵)’라는 노래가 있다. 언더그라운드 포크 가수이자 찬불포교사인 이종만이 부른 노래인데, 우리 가락과 포크음악의 접목을 시도했던 창작포크가요 모임 ‘참새를 태운 잠수함’ 출신인 그가 1986년 그룹 ‘이종만과 자유인’으로 낸 1집 앨범 ‘음악이 생의 전부는 아니겠지만’에 처음 실렸던 곡이다. 노래 제목과 가사는 자연스럽게 이효석의 단편 <메밀꽃 필 무렵>(1936년)을 떠올리게 한다. 봉평장을 마치고 다음날 열리는 대화장을 위해 달빛 젖은 하얀 메밀밭 밤길을 걸어가는 허생원, 조선달, 동이와 나귀들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등짐장수와 봇짐장수
 
<단원풍속도첩(檀園風俗圖帖)>의 그림 ‘행상’을 보면, 부부로 보이는 듯한 행상남녀가 길을 가다 멈춰 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사내의 행색으로 말하자면, 쓰고 있는 모자가 양 옆에 목화송이를 단 패랭이와 비슷해 보이고, 들고 있는 지게 작대기는 끝에 뾰족한 쇠를 끼운 촉작대(물미장) 같으며, 등에 커다란 나무통을 지고 있는 것이 영락없는 등짐장수의 모습이다.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지팡이를 쥔 채 포대기도 없이 젖먹이를 윗저고리 속에 업어 안쓰러워 보이는 아낙은 봇짐장수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러한 등짐장수(부상), 봇짐장수(보상)를 통틀어 부보상(負褓商)이라 일컫는데, 부상은 생선, 소금, 나무그릇, 질그릇, 무쇠 등 부피가 크고 값싼 생활용품을 대량으로 지게에 지고 다니며 파는 상인이고, 보상은 베, 무명, 비단 같은 피륙이나 금·은·동으로 된 세공품 같이 부피가 작고 값나가는 것을 보자기에 싸서 휴대하거나 질빵에 걸머지고 다니며 파는 상인을 뜻한다. 
 
조선시대 보부상의 모습을 그린 김홍도의 '행상'. 보물 527호. 단원 풍속도첩 수록.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이들의 존재는 고대 때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유통경제의 중심이자 조직으로서의 부상과 보상의 활동이 돋보였던 것은 조선시대이다. ‘부보상’이라는 명칭은 태조 이성계가 고려 말기 여진과의 전투 때 위급한 상황에 처했던 자신을 구해주고 이후 조선 개국에도 큰 도움을 준 행상 대표 백달원에게 유아부보상지인장(唯我負褓商之印章)이라는 옥도장을 하사했다는 데서 나타난다. 태조는 또한 부보상들의 본부인 임방(任房)을 설치하고 목기, 토기, 수철(水鐵, 무쇠), 소금, 어물의 다섯 가지 식필품에 대해 전매특허(專賣特許)를 주었으며, 위상애당(爲上愛黨) 즉 윗사람을 받들고 동료를 사랑할 것과, 병구사장(病救死葬) 즉 병이 나면 구료하고 사망하면 장례를 치러 주라는 교서를 내리는 등 중상육성정책을 실시한다. ‘부보상’이 명시된 옥도장은 임방의 공사(公事)를 증빙하고 관아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상업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상징물이었던 셈이다. (참고로,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보부상’이라는 용어가 조선총독부의 ‘억상이간책략(抑商離間策略)’에 의해 변조된 명칭이라는 의견이 있으나 이는 논란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지난 2012년 청계천 광통교 인근에서 열린 '7회 종로청계관광특구 육의전 체험축제'에서 행사 관계자들이 과거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자료사진/뉴시스
 
<만인보> 속의 행상들
 
<만인보>에 묘사된 일제강점기 고은 시인의 고향마을에는 이 보부상들의 모습이 종종 나타난다. “대길이 머슴방에는 등짐장수도 오지 / 아랫녘 담양 대바구니 대소쿠리 겹겹이 매어 지고 / 멀리멀리 북녘 두만강 상상봉까지 서수라까지 / 하도 추워서 가다가 얼어붙고 가다가 얼어붙고 해서 / 봄이 와야 발바닥이 떨어진다는 그곳까지 / 내 나라 실컷 떠도는 등짐장수도 오지 / 그가 그만 장삿길에 대바구니값 없애고 / 딱한 처지가 되자 / 선뜻 대길이는 새경 밑천 뚝 떼어 / 돈을 뀌어주었지 / 내년 이맘때 갚으러 오겠네 / 등짐장수 신바람 날리며 떠난 이래 / 한해 두해 되어도 감감무소식이라 / 거봐 / 거봐 / 사람마다 대길이 돈 떼였다고 떠들어도 / 정작 대길이야 아무 내색도 없이 / 높이높이 가는새끼 꼬아올리지 / 그런 뒤 두 해포 지난 어느 초겨울 / 돈 꾸어간 대바구니장수 드디어 나타났지 / 허어 술 한 병하고 마른 가오리 한 죽도 사왔지 / 3년 전의 빚과 거기에 더 얹은 얼마 내놓으며 / 돌고 돌다가 이제야 왔네 미안스럽네 / 대길이도 대꾸 한마디 / 그동안 고생 많았지요? / 한잔 먹세 / 그럽시다 / …“(‘대바구니장수’, 1권).
 
이 시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머슴 대길이 아저씨와 대바구니장수 간의 인간적 신뢰와 소통, 공감대가 자아내는 깊은 맛의 휴머니즘이겠으나, 그 옆에 또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이 있다. 그것은 사정상 몇 년이 걸릴지라도 돌아와 이자를 쳐서 빚을 갚는 이 등짐장수의 태도이다. 보부상단 윤리강령은 앞서 말한 위상애당(爲上愛黨), 병구사장(病救死葬)에 진충보국(盡忠保國)이 첨가되었고, 네 가지의 엄한 규율이 있었으니 물망언(상업활동을 하는데 헛된 말을 하지 말라), 물패행(패륜적인 행동, 즉 상대를 억압해 이득을 취하지 말라), 물음란(음란한 짓을 하지 말라), 물도적(도둑질을 하지 말라)이 그것이다. 이 규율은 보부상의 소속을 밝혀주는 증명서인 체장(첩지)의 뒷면에 적혀 있었다고 하는데, 이를 어기면 형벌에 처해졌다. 또한, 소속 상인들 중 누가 상을 당했을 때 안 가면 큰 벌금을 물어야 했고 다툼이 있어도 벌칙이 주어졌다하니 규율의 엄격함을 짐작할 수 있다.
 
상인 그 이상의 의미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계층을 만나 정보를 전달하던 보부상들은 물건만 파는 것이 아니라 지역 간, 계층 간을 잇는 통로로서 문화교류자의 역할도 담당했다. 그러한 역할들 중 집안 단위에서 가장 빈번했던 것이 아마 ‘중신어미’의 역할일 것이다. “함석다라이에 가을 갈치 / … / 쌍가마 머리에 고봉으로 담아 이고 / 이 마을 저 마을 정정하게 떠돌며 / 갈치 몇 마리 들여놓으시오 / 들여놓으시오 / 하고 외친다 / 필시 먹은 것도 없을 텐데 / 어디서 그런 소리 상하지 않고 나오는지 / 벌써 다라이 한쪽에는 / 곡식으로 받은 생선값 채워지니 / 엎친 데 덮쳐 / 얼마나 무거운가 / 동네 개가 까불어대며 짖어도 / 땀범벅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고 / 들여놓으시오 / 들여놓으시오 / 그런 장사 틈에도 / 30리 안팎 처녀 총각 짝지어 / 중신에미 노릇도 단단히 하니 / 그 입담 한번 푸짐하여 / 듣는 귀 금방 솔깃한다 / 아 글쎄 / 그 집 딸 젖통 한번 분통이고 / 새끼 한 죽은 실컷 먹이고 남을 젖통이고 / 아 글쎄 / 그 집 딸 방뎅이 한번 아무개네 선산 무덤이고 / 아 글쎄 / 그 집 암소도 새끼 세 배째인데 / 금송아지 두 마리 낳아 / 움메움메 하고“(‘갈치장수 아주머니’, 4권).
 
보부상단은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는 대신 정치적인 활동을 수행하게 된다. 예를 들어, 임진왜란, 병자호란 때 부상들이 동원되어 식량과 무기를 운반·보급하고, 첩보전이나 직접 전투에도 가담하였다. 그들은 정조의 수원성 축조나 병인양요 때에도 동원되었다. 보부상단을 관할한 관청은 삼군부(三軍府)에서 군국아문(軍國衙門, 1883년), 혜상공국(惠商公局, 1883년), 상리국(商理局, 1885년), 농상아문(農商衙門, 1894년), 그리고 대한제국 시기에는 상무사(商務社, 1899년)로 바뀌었다. 당대로서는 일종의 정경유착이다보니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부보상들이 동학군을 진압하는데 동원되고 이후에도 독립협회 해산에 동원되는 등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하였는데, 독점권을 가지고 시장을 장악했던 대형조직의 이면에는 조직원들 내부의 빈부격차로 인한 가난한 부상과 보상들이 국가권력에 의해 동원되어 같은 민중을 탄압하는 역할을 맡았어야 했던 가슴 아픈 역사가 있다.
 
“웅천장 체장수 / 어깨 양쪽에 체 열두 틀씩 / 스물네 틀 지고 / 식전 장에 나와도 / 하루내내 서너 틀 나가고 만다 / 나머지는 다시 지고 일어나 / 무작정 동네방네 떠돌며 / 반강제로 떠맡긴다 / 아따 체 걸어두시유 / 내일모레 쓸데 생겨유 / 그러다가 어느 동네 / 서러운 집 푸념 들어주고 / 병난 집 병구완도 해주고 / 체 파는 일 말고 / 일손도 거들어주고 / … / 그러면서 / 체 지고 떠난다 / 이렇게 아무 걱정 모르고 다니다가 / 장날 체 부려놓고 / 꾸벅꾸벅 졸기도 한다 / 이렇게 지내다가 / 내포 들녘 오일장 다니다가 / 집에 돌아오면 / 어린것 불쑥 커서 어른 되었다 / 낳아놓기만 하면 / 하늘과 땅 사이 세월이 키워주었다 / 이렇게 키워 / 어느새 어미 키 다다랐다 / 체 남은 것 내려주었다 / 어머니라 해야 / 사내 지른 얼굴이라 / 어머니인지 / 아버지인지“(‘체장수’, 9권).
 
조직력과 정보력으로 조선시대 상업활동의 주축을 이루었고 교통의 발달에도 기여했던 이들, 때로는 국가 이익에 기여하고 때로는 민중 탄압에 동원되었던 이들, 평생을 길 위에서 산 등짐장수와 봇짐장수들은 1905년 일제 통감부에 의해 상무사가 강제로 해산됨으로써 일본 상권에 주권을 빼앗긴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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