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risk)이란 영어단어는 이탈리아어인 ‘rischiare’에서 비롯됐다. 이 단어는 “위험을 무릅쓰고 도전하다”란 뜻이다. 그런데 리스크란 단어는 최근 기업 경영전략 체계 안으로 수렴되면서 그 뜻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위험을 감수하기보다 회피하는 식으로 말이다. 경제용어사전을 보면 그러한 변화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리스크 매니지먼트(risk management)는 기업경영이나 조직운영에 따르는 제반 위험의 악영향으로부터 자산이나 사업 수행력을 최소 비용으로 보호하는 방법이라고 명시돼있다. 이와 관련해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는 최근 ‘어떻게 리스크와 더불어 살 것인가?’란 제목의 칼럼을 게재하고 리스크 본연의 뜻을 기억해야 위험관리와 수익 확대란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고 조언한다.
◇글로벌 금융위기, 기업 위험회피 본능 키워
리스크 매니지먼트의 패러다임이 원어 그대로의 뜻이 살아나는 식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리스크를 회피하거나 최소화하려는 태도로는 위기가 되풀이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리스크 매니지먼트는 지난 2002년 엔론과 월드콤이 회계 스캔들로 몸살을 앓았을 무렵에 대두됐다. 위험를 감수하기 보다 예방하고 최소화해야 한다는 태도가 강화됐다. 한 순간의 위험 방어 실패로 대기업들이 나락으로 떨어지자 기업들이 겁을 먹은 것이다. 이후 2008년에 터진 글로벌 금융위기로 시장 환경이 악화되면서 이런 경향성은 더욱 더 짙어졌다. 기업에 공격성 보다는 방어적인 성향이 강화된 것이다. 특히 금융 기업들은 신용 리스크를 회피하기 위해 소극적인 리스크 매니지먼트를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다른 분야의 기업들 또한 은행의 뒤를 따라 성장과 수익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손해를 피하고 보자는 태도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기업들 사이에서 위기를 피하기 보다 감수하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사진은 카라카스 해드허터 사
무실에서 직원 둘이 이야기하는 장면. (사진=로이터)
그러나 최근 들어 미국 기업 중진들은 리스크 관리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며 불안감에 차있다. 실제로 CEB 뉴 리서치에 따르면 미국 기업 전략팀 인사 60%는 위기 예방에만 너무 집중한 나머지 기업의 의사 결정 프로세스가 너무 지연되고 있다고 답했다. 오직 20%만이 위험을 감수하는 것을 즐긴다고 응답했다. 물론 경제·사회를 둘러싼 불확실성이 커진 시대에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 기업 내부에는 산업 스파이가, 외부에는 최첨단 기술로 무장한 해커들이 호시탐탐 기업의 정보를 노리고 있는 판국이다. 다만 문제는 돌다리 두드리느라 주어진 기회를 놓칠 수 있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기업이 몸을 사리느라 낭비한 시간만 줄이면 지금보다 수익이 두 배 가량 늘어날 것이라고 평가했다. 글로벌 비즈니스 자문 회사 CEB의 맥스 쉰크맨 전문가는 “리스크 매니지먼트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할 시점”이라며 “기업들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 수립한 위험 관리 시스템이 지금도 잘 작동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리스크 관리 편중돼 기업 시장 가치 떨어져
리스크를 최소화하려는 기업의 소극적인 태도도 문제지만, 그 활동 내용 또한 한 쪽으로 편중된 것 또한 위기를 키우고 있다. Hbr은 미국 기업의 절반가량이 재무보고서와 법적 문제를 관리하는 데만 리스크 관리 역량의 절반을 소모하고 있다고 본다. 진짜 신경 써야 할 부문은 전략적 위험(strategic risks)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인데도 말이다. 전략적 위험은 잘못된 사업 계획을 이행하느라 재원을 낭비하는 것을 말한다. 실제로 CEB가 지난 10년간 기업의 시장 가치를 갉아먹는 요인이 무엇인지 조사해 보았더니 전략 부문이 86%로 1위에 올랐다. 나머지 운영(9%)과 법률(3%), 회계(2%) 부문이 그 뒤를 따랐다. 아울러 기업들은 ‘파이팅더라스트워(fighting the last war)’의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이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이전의 전략이 다음 번에도 통할 것이란 확신을 비꼬는 말이다. 기업의 경우엔 과거 위기관리 전략이 오늘과 내일에도 여전히 유효할 것이란 안일한 생각을 지목할 수 있겠다. 그러나 예전 방식만 고집하다가는 빠르게 발전하는 기술력을 따라잡을 수 없는 데다 새로운 위기에 대처할 만큼 유연해질 수도 없다.
이런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기업인들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이나, 위기관리 전문가들은 갈 길이 멀다고 지적한다. 가장 중요시되는 것은 어떤 사업에 따르는 리스크와 돌아오는 수익의 균형점을 적절히 설정하는 작업이다. 이는 전략적 위험 전략의 일환으로도 볼 수 있는데,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위기인지 꼼꼼히 점검해 보는 것을 뜻한다. 한 대형회사가 있다고 치자. 이 회사는 리스크와 수익의 균형점을 고려해 지난 35년간 유지해온 고객 서비스 관리 정책을 과감하게 폐기 처분했다. 이런 전략이 가능 하려면 리스크 매니지먼트와 리스크 예방을 동의어로 보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위험이 없는 곳에 수익도 없다는 사고방식을 지니는 것 또한 필수다.
◇모든 직원이 리스크 매니저 업무 동참
직원 한 명 한 명이 모두 리스크 매니지먼트에 동참하는 것도 필요하다. 일부 직원들은 리스크 관리를 귀찮은 업무쯤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리스크 관리팀에 대한 의존도를 키울 뿐 아니라 위험관리 프로세스의 효율성을 떨어뜨린다. 모든 직원이 사업 결정 과정에서 리스크를 의식적으로 떠올려야 한다.
이런 작업을 잘하는 기업 중 하나가 IBM이다. IBM은 전세계 직원 38만명의 위기 관리 능력을 배양하기 위해 30개의 리스크 관리 온라인 강좌를 개설했다. 부담없이 재미있게 리스크 관리법을 전수하려고 강좌마다 게임화(Gamification) 기법을 접목시켰다. 게임화(Gamification)는 게임(Game)과 접미사 ‘화(fication)’를 합친 신조어로 게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미와 보상, 경쟁 등의 요소를 다른 분야에 적용하는 기법이다. 이로써 IBM 직원들은 게임 하듯 재미있게 리스크 관리법을 배울 수 있게 됐다. 루이스 쿠스토디오 IBM 수석 리스크 오피서는 “회사의 모든 직원이 리스크 관리자”라며 “우기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전략적 이득을 취하는 것이 IBM 사업 전략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직원들에게 일일이 리스크 관리법을 교육할 수 없다면, 애초부터 그러한 능력을 지닌 사람을 채용하는 것 또한 생각해 봄 직 하다. 면접 과정에서 리스크를 대하는 태도를 알아보는 것이다. 처음부터 위기를 짊어지려는 사람을 채용하면 트레이닝 비용을 아낄 수 있다.
◇리스크 매니저, 각 부서 다리 역할
직원 모두가 리스크 매니저 역할을 자처해야 하지만, 위기 관리팀은 각 부서를 적절하게 지원하거나 중간에서 연결해주는 일을 제대로 수행한다. 날실과 씨실이 직각으로 교차해 하나의 직물을 만들어내듯, 리스크 매니저는 모든 사업에 날실처럼 연관돼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특히 어떤 사업이 진행되기 앞서, 어떤 위기가 잠재해 있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작업이 가장 중요하다. 모든 사업이 다 마무리된 다음에 위험 보고서를 내는 현재의 관행과 대조되는 모습이다. 가령 레고 선임 리스크 전략 매니저는 어떤 부서의 사업이 회사 전체 프로젝트와 맥을 같이 하는지 점검해 준다. 그렇지 않다면 수익보다 리스크가 더 큰 사업이란 결론을 내리고, 사업 자체를 지연시킬 수도 있다. 반대로 회사가 그리는 그림에 부합하고 리스크 보다 수익성이 크면 다른 부서들의 협조를 요청하는 식으로 전폭적인 지원을 해준다.
리스크 매니저는 또 각 사업 담당관이나 업무최고책임자(COO)에 리스크 보고서를 보낼 의무도 있다. 이전 리스크 매니저들은 법무 자문위원(general counsel)과 준법 감시인(compliance officer) 등 주로 법률 관련 전문 부서에만 보고서를 제공해 왔다. 그러다 보니 다른 일반 부서들은 회사의 위험 요소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채 사업 결정을 내리다 곤욕을 치르는 경험을 하곤 했다. 위기관리 전략은 채용 시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일부 기업의 리스크 매니저는 퇴사하는 직원을 상대로 인터뷰를 해 잠재 리스크를 파악한다. 회사 내부 직원들이 남의 눈치를 보느라 말하지 못하는 민감한 문제를 털어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윤석진 기자 ddagu@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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