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삭아 낡아버린 옛 전통과 생생한 날 것만 같은 새 문화가 한 상자로 꾸려져도 될까 하는 염려는 노파심에 지나지 않는다. 잘 기획된 축제나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몰리는 지역의 관광명소는 마치 종합선물세트 같은데, 전라북도 전주의 전주한옥마을 거리가 꼭 그러하다. 다 스러져가던 한옥 800여 채를 손보아 꾸리고, 세월의 더께가 얹혀진 문화유적들을 재단장하고, 자꾸만 손님수가 줄어가는 옛 남부시장의 빈 터에 청년들을 불러 야시장을 열어놓고, 그 곁에서 맨드라미 닮은 장어미들이 꽃처럼 앉아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비빔밥스럽게 뒤섞이고 콩나물국밥처럼 정스러우니 한 마당 잔치처럼 걸판지다. 그 거리에 '기왕이면, 한복이지'라며 젊은이들이 한복차림으로 활보하기 시작했다.
한복을 입고 거리를 누비는 젊은이들, 벽화가 그려진 자만마을의 골목을 걷는 가족단위 여행객과 경기전에서 왕조의 세월을 더듬는 늙은이들의 느린 걸음이 모두가 한 상자에 칸칸이 담겨 제자리를 채우고 있다. 어우동의 맵시로 한옥마을 거리를 누비는 여대생들은 늙은이들이 차마 용기 내어 꺼내어 입지 못한 한복을 차려입고 거리를 활보한다. 어차피 문화를 즐길 거라면 마음껏 즐겨보자는 것이 젊은이들의 문화행태이다. 한복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것에 대해 젊은 치기로 폄하하며 마땅치 않게 여길 필요는 없다. 문화의 속성이 길과 시간의 흐름과 같다고 보면, 젊은이들의 활보에 박수를 칠 일이다.
◇전주한옥마을에서 한복데이를 즐기는 사람들.(사진=이강)
◇전주한옥마을에서 비빔밥스럽게 놀아 봐
전주는 한옥마을이 지금처럼 유명세를 떨치기 전에도 비빔밥처럼 각양각색이고, 콩나물국밥처럼 서민적이며, 탁배기 한 사발 들이키고 싶을 만큼 신명나는 고장이다. 비빔밥처럼 비벼지고 콩나물국밥처럼 뒤섞인 것이 전주의 맛과 멋이다. 옛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시간이 뒤섞인 거리, 전주한옥마을을 걷는다. 전주한옥마을 거리는 잘 포장된 선물 보따리처럼 푸짐하다. 옛 거리에 현재적 볼거리와 즐길거리, 먹거리가 넘친다. 자꾸만 눈길이 머물고, 손이 가고, 걸음을 멈추게 되는 이유다.
한옥마을의 시작점인 경기전(慶基殿)과 전동성당이 마주하고 있는 초입은 여행자들이 길놀이를 시작하는 기점이다. 조선왕조 태조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과 조선왕조의 핍박을 받았던 전동성당이 마주 보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인데, 이 역시 지난 시간의 뒤섞임이자 현재적 시점에서의 문화적 재배열에 불과하다. 경기전은 태종 10년(1410년)에 세워져 세종 때 이르러 경기전이라는 이름이 불리는데,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봉안되어 있는 신성의 공간이다. 그와 마주한 천주교의 순교성지인 전동성당은 정조와 순조의 박해에 의해 풍남문 밖에서 사형 당한 순교자들의 무덤터에 세워졌다. 전동성당의 건립은 1891년(고종 28) 프랑스인인 보두네(Baudenet) 신부가 부지를 마련하여 1908년 건립을 시작해 23년만인 1914년에 완공되기에 이른다. 당시는 일제강점기로 외세에 짓눌려있던 시기였다. 때문에 전동성당의 주춧돌은 일제에 의해 헐린 전주읍성 풍남문 성벽의 잔해인 성돌로 그 기초를 헤웠다고 전해진다.
◇경기전. (사진=이강)
◇전동성당. (사진=이강)
◇풍남문. (사진=이강)
역사의 관점으로 보자면 서로 대놓고 마주할 처지가 아닌, 경기전과 전동성당과 풍남문이 모두 하나의 거리에서 새로운 문화적 공간으로 재배열되어 있는 것이다. 서로 다른 시공간의 문화가 마치 전주의 비빔밥처럼 뒤섞여짐으로 새로운 문화의 거리를 탄생시킨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 오래 거슬러 올라 갈 것도 없는 현대적 전주의 문화는 또 어떠한가? 올해로 41회째인 전주대사습놀이가 처음 열리던 때가 70년대 중반 즈음이다. 그즈음 전주의 여름거리는 전주대사습놀이가 관통하고 있었다. 그때면 전국의 소리꾼들이 전주로 몰려들고 갓 쓴 할아버지와 신명 좋은 할머니들이 이 거리를 활보했었다. 벌써 40년이 넘은 일인데, 늙은이들은 그 때가 바로 엊그제만 같아 자꾸만 뒤를 돌아다 본다. 모시 적삼에 합죽선을 짚고 늙은이들이 걸어가던 그 거리에 이제 반바지와 미니스커트 차림의 젊은 것들이 셀카봉을 들고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지금 거리를 활보하는 것이 곧 문화
옛 것과 새 것은 길 위에서 만나고 헤어지기 마련이다. 먼저 길을 걸어간 선인들의 시간을 지나 후세가 그 뒤를 다시 걷는 것이 길의 속성이며 시간의 속성이다. 한 세대의 문화가 스러지는 순간 새로운 문화들이 재탄생되는 것 역시 역사의 순리다. 퇴색되고 낡은 것들이 스러지는 그늘에 다시 새로운 문화가 환하게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마치 맞다. 옛 것은 고귀한 것이나 새 것의 한 걸음을 막아설 만큼 강력해서는 안된다. 이 낡은 거리에 젊음이 활기찬 것처럼 기쁜 일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이제 전주한옥마을은 주말이면 사람들이 몰려드는 통에 거리 곳곳에 각양각색의 문화와 뒤섞이고 어우러진다. 낡고 퇴색한 전주한옥의 풍경 사이사이, 이국적 풍경의 카페와 예술적 색채를 지닌 공간이 들어서며 비빔밥스럽게 뒤섞여지며 어우러진다. 콩나물 시루만 같이 북적이는 거리에서는 내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 관광객들도 있는 그대로의 문화를 즐거이 만끽한다. 풍선을 든 아이들은 비빔밥의 생나물처럼 생그럽게 거리를 활보하고, 늙은이들은 늙은이대로 구수하고 감칠맛 나는 나물무침이나 잘 데친 고명처럼 꼬숩게도 어우러진다. 그 중 방점을 찍는 것이 한복차림새로 거리를 무한횡단하는 젊은이들의 행보이다.
◇전주한옥마을 거리를 활보하는 젊은이들. (사진=이강)
서울에서 내려온 한 무리의 여대생들이 '한복데이'를 맞아 한복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며 즐거워한다. 이들에게 한복입기는 하나의 즐거운 오락이면서 개개인이 문화주체로서 행하는 퍼포먼스이다. 다양한 포즈를 취하는 여대생들의 몸짓은 가볍고도 즐겁다. 어른 세대들이 차마 꺼내 입지 못한 '무겁고도 단단한 한복의 옷고름'을 풀고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느낌이다. 거리에 한복을 입고 거니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본 지가 도대체 얼마만인가? 명절이건 평일이건, 나라의 경사건 개인의 기쁜 날이건 아무런 날에도 민족고유의 복색을 갖추어 입지 못하는 처지가 된지 또 얼마나 오래되었나? 다소 무겁고 경직된 우리의 전통문화가 고운 한복 입은 젊은이들의 걸음처럼 활기차게 다시 살아나는 느낌이다.
한옥마을과 자만벽화마을, 남부시장 골목골목을 누비며 사랑과 추억을 만드는 젊은이들의 행보는 건강하고 유쾌하다.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된 실천의 행동이다. 이들은 단지 전통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젊음에 걸맞는 자만벽화마을의 담장을 배경으로 셀카봉을 높이 들고, 입맛에 맞는 먹거리를 찾아 카페골목을 누빈다. 한복에 셀카봉, 전주비빔밥으로 속을 채운 바게트 버거을 든 이들은 여행문화를 새롭게 만들어간다. 전통의 비빔밥과 순대국을 찾아 남주시장의 골목장터를 찾아 헤매기도 한다. 전통의 거리에서 어우러지는 현재적 시공간을 자유로이 행보하는 것은 젊음의 특권이다. 한복을 차려입고 전주한옥마을의 거리를 누비는 젊은이들의 걸음은 아주 발랄하고 기발하다. 문화의 본질이 비비고 섞이고 어우러지는 것이라 상정한다면, 따지고 타박할 흉이 아니다. 옛 것들이 사라지는 가운데 또 다시 새로운 문화의 싹이 자라고, 또 다음 세대와의 소통의 매개나 통로로서 역할을 할 것이다. 옛 것이 다시 현재의 거리에서 생명을 얻는 것이라면, 비벼지고 뒤섞인 시공간의 재창출은 문화의 행보에 대한 답일지도 모른다. 옛 것과 새 것을 한 꾸러미로 꾸린 전주한옥마을은 속이 알찬 종합선물세트에 다름 아니다.
이강 뉴스토마토 여행문화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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