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막을 내린 연극 <허물(츠쿠다 노리히고 작, 류주연 연출)>에는 여섯 명의 아버지가 나온다. 아버지가 여섯이라니. 대안가족? 세파의 격랑을 타고 넘는 기구한 운명? 아니면 <화이> 같은 액션 스릴러? 모두 아니다. 여섯 명의 아버지는 모두 한 아버지이다. 연극의 이야기는 이렇다. 남자는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돌보면서 어머니의 49재를 치르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현재의 모습을 허물처럼 벗고 60대의 아버지가 되더니 장면이 바뀔 때마다 다시 허물을 벗고 점점 더 젊어진 아버지가 등장하는 것이다. 무대 위에는 80대, 60대, 50대, 30대 아버지의 허물들이 놓여 있고, 남자는 이제 자신의 삶에서도 먼 추억의 시간인 20대 청년 아버지와 마주서 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아버지가 허물을 벗고 젊어진다는 설정 때문인지 이 연극을 소개하는 기사들에서는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 대한 언급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김재엽의 연극 <알리바이 연대기>가 떠올랐다. <허물>도 그렇고 <알리바이 연대기>도 그렇고 두 작품은 모두 나와 내가 알지 못했던 아버지와 아버지의 시대와의 만남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허물>에서 허물을 벗으면서 점점 젊어지는 아버지들에게는 전후 고도성장기의 열정과 고단함, 패전 후의 방황과 피폐함 등 일본의 현대사가 밑그림으로 새겨있다. <알리바이 연대기>에서는 작가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 형이 등장하는데, 재엽은 오사카에서 해방을 맞이한 소년시절의 아버지, 한국에 돌아와 해방과 전쟁의 혼란을 겪고 장준하 선생의 국토재건위에서 꿈에 부풀었던 청년시절의 아버지를 만난다. 하지만 이 연극에는 허물을 벗는 것과 같은 판타지가 없다. 연극은 그저 재엽과 아버지, 재엽과 형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전개된다. 그런데 이야기들이 장면화 되면서 흥미로운 장면들이 연출된다. 소년시절의 아버지에게 황혼기의 아버지가 말을 걸고, 아직 어린 아이인 형과 중년이 된 현재의 재엽이 그 시절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
<허물>과 <알리바이 연대기>는 아버지와 아들을 통해 가족사와 시대를 교차하는 전개하면서 역사를 되돌아보는 유사한 모티브들을 공유하고 있다. 일본과 한국이라는 다른 사회에 속한 작가들이 비슷한 시기에 자신들이 속한 사회의 과거를, 그것도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소소한 개인들의 삶을 통해 되돌아보고자 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허물>이 좀 더 가족사를 전경에 두고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 이 두 작가가 아버지에서 나로 이어지는 '역사'를 무대에 꺼내놓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극적 전략이 사뭇 다르다. <허물>이 '허물을 벗는다'는 판타지에서 시작한다면 <알리바이 연대기>는 서로 다른 시공간이 공존하는 무대 연출이 이 만남을 전개한다. 이 다름은 그저 다른 작가 다른 작품의 서로 다른 스타일의 차이일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허물>을 보면서 <알리바이 연대기>를 다시 생각한다. 황혼의 아버지가 일본이 패전했다고 울고 있는 어린 소년인 '나'를 지켜보고, 우애 깊은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언쟁을 벌이던 일을 어린 소년인 형이 중년의 동생에게 들려주는 장면들. 연극적으로 명민한 재미있는 연출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어쩌면 연출가의 연극적 고안을 넘어서는 우리 사회의 '리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게 '과거'는 판타지를 통과해서 되불러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항존 하는 현실이 아닐까. 굳이 연극이야기를 듣지 않더라도 시시때때로 과거는 여전히 우리 주위를 맴돌고 우리 는 그것과 마주선다. 아니다. 과거가 너무 익숙하게 우리 삶을 배회하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보여주는 연극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김소연 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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