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 ‘메르스 사태’의 중요한 본질은 ‘신뢰’의 훼손이다. 여기서 신뢰는 어떤 지지나 믿음 보다는 신인도에 더 가깝겠다. 영어로 따지자면 ‘faith’ 보다는 ‘credit'이란 말이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권력을 수임하고 있는 특정 정권에 대한 지지여부를 떠나, 국민들이 정부와 공권력의 기능에 대해선 상당한 신뢰를 갖게 된다. 교육, 치안, 보건, 선거 중립 등이 기본 중 기본이다. 이른바 선진국일수록 그 신뢰의 강도가 더 세고 폭이 넓다. 요컨데 'credit'이 쌓일수록 ‘faith’가 강해진다. ‘credit'을 상실하면 ’faith'는 저하된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그랬다. 특정 정권에 대한 지지 여부와 별개로 정부 기능 작동에 대해선 크게 걱정이 없었다. 한국의 관료제는 때론 오작동을 일으키고 사고를 치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보면 너무 강한 것이 문제였다.
그런데 현 정부 들어선 이 같은 기본적 신뢰에 손상을 입히는 일들이 많았다. 특정한 사건도 그랬지만 그 사건 ‘이후’가 더 문제였다. 세월호 참사 이후 구조, 수습, 사후조치,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시행령 파문이 그렇다. 이른바 정윤회-십상시 파동 역시 수습 과정이 더 황망했다. 방산비리는 무조건 막겠다고 한 이후 현역 장성들의 수뢰 사태가 터지고 현역 공군참모총장이 부적절한 처신으로 경고를 받았다. 정치개혁, 비리척결 깃발을 든 이후 현직 총리가 물러나고 광역단체장이 기소 당했다.
물론 참여정부 때나 이명박 정부 때라고 해서 잘만 돌아갔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치적 찬반을 떠나 그 대통령들이 행정부를 장악하거나 운용하는데 본질적 어려움을 겪은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대통령이 정부를 너무 잘 장악해서 문제였다.
하지만 현 정부 들어선 국가원수이자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이 관료조직을 잘 파악하고 장악해서 원활히 운용하고 있냐는 데 대한 본질적 의문이 강해지고 있다. 이번 메르스 사태가 바로 정점이다.
정부 전체가 우왕좌왕이다. 7일 총리직무대행인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큰 마음을 먹고 메르스 환자가 발생하거나 경유했던 병원 24곳을 밝혔지만 그 중 다섯 곳의 이름과 지역이 틀린 것으로 곧바로 드러났다.
이 정부는 지난해 세월호 참사 직후 교육·보건복지·사회·문화분야 컨트롤 타워의 필요성에 따라 사회부총리제를 신설했다. 황우여 교육부 장관이 사회부총리지만 이 국면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고심 끝에’ 해경이 해체된 이후 국민의 안전 전반을 책임진다는 명분으로 설립된 국민안전처 역시 마찬가지다. 확진환자 발생 후 16일 만에 문자메시지 한 통 보낸 것 외엔 납작 엎드려 있다. 전 새누리당 의원이 원장으로 있는 국립중앙의료원은 야당 대표의 방문 요청은 거절하고 여당 대표는 환대해 입길에 올랐다. 10년 전엔 세계에 자랑할 만한 모범적 기관이었던 질병관리본부는 말할 것도 없다. 이러다보니 이제는 정부가 옳은 말을 해도 안 먹힐 지경이다. 기본적 신뢰가 훼손되면 공동체 전체가 지불해야 할 비용이 늘어나고 효율성이 훼손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꾹 참고 정부를 믿고 힘을 실어주자”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정부가 그래도 국민을 보호할 것’이라는 신뢰 때문이 아니라 ‘정부가 더 흔들리면 더 큰 사고 나겠다’ 싶어서다. 너무 기죽여도 안 되겠다 싶어서다.
황교안 총리 후보자가 그랬다나? 애국가 4절 완창이 나라사랑의 기본이라고. 근데 이 정부 아래에선 너도 나도 우국(憂國)지사 될 판이다.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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