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백성의 조선’과 ‘왕의 조선’
2015-05-19 15:00:07 2015-05-19 15:00:07
우리 역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한 장면을 들라고 하면 단연코 이순신(장군)이 선조에게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당시 조선이 처한 군사적 상황을 볼 때 12척의 배를 가진 이순신이 패배 말고는 다른 결과를 얻을 수 없다고 조정은 판단했다. 그럼에도 일본의 300척에 맞서 목숨을 걸고 반드시 조선의 앞바다를 지키겠다는 이 말속에는, 단순한 결기를 넘어 이순신이라는 군사전략가가 조선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이순신이 처한 정치적 환경은 결코 좋지 않았다. 벼랑 끝 조선을 승리로 지켜낼 때마다 오히려 선조의 냉대와 붕당에 의한 정치적 공격, 끊임없는 모함을 받았다. 상식적으로 볼 때 승리한 장수에게 상을 내리고, 직급을 높이는 승진이 따라는 것이 관례지만 이순신은 오히려 반대였다.
 
조선의 바다를 백척간두에서 지키고 있다는 두려움 속에서도 이순신은 칼날 같은 정신으로 군사를 훈련시켰고, 민생을 보살폈다. 병사들과 동고동락했으며, 백성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주둔지 근처에 시장을 열 수 있도록 했다. 왕과 조정대신들이 버리고 간 조선을 백성들의 삶속에서 지켜냈다. 당시 ‘조선’은 없었다.
 
하지만 ‘또 다른 조선’은 호남 앞바다에 있었다. ‘선조의 조선’은 무너졌지만, ‘이순신의 조선’은 백성과 군사들의 삶속에서 살아남아 있었다. 이순신에게 남겨진 ‘12척 판옥선’은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다는 점에서 조선의 마지막이자, 조선의 전부였다. 불 타 없어진 선조의 경복궁을 대신했고, 이순신과 함께 나라를 지킨 ‘백성들의 경복궁’이었다.
 
수백의 판옥선을 가진 ‘선조와 조정대신의 조선’은 정쟁과 자신들의 안위, 비루한 욕망에 의해 참담하게 무너졌지만, 백성의 피와 병사의 목숨으로 지켜진 ‘12척 이순신의 조선’은 노량 앞바다에서 조선을 시퍼렇게 지키고 있었다. 일본이 한 번도 넘지 못한 가장 견고한 ‘이순신의 조선’이었다.
 
우리는 묻는다. 어느 조선이 백성의 나라인가? 노량 앞바다에서 백성과 병사가 목숨을 걸고 싸우던 ‘12척의 조선’인가, 수백의 판옥선을 가지고도 백성을 일본의 칼날에 내버려두고 도망가기 바빴던 ‘조정대신의 조선’인가. 백성과 병사들이 얼음처럼 차가운 두려움에 떨면서 지키고자 했던 조선은 과연 누구의 조선이었는가.
 
이순신은 수많은 해전에서 승리하고도 선조와 조정대신들의 정치적 이해와 원균의 비루한 욕망 탓에 감옥에 갇혔다. 구중궁궐의 정치적 흥정으로 계급장이 떼이고, 고문을 받고, 백의종군했다. 바다 보급로를 확보해 조선의 완전한 점령을 눈앞에 뒀던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심은 막아냈지만, 왕과 대신들의 야심은 피하지 못했다. 그 순간 그는 조선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감옥에 갇히고, 고문당하고, 어머니 상도 치르지 못하는 처지에 몰린 그가 지키고 싶었던 조선은 어떤 나라였을까.
 
전쟁이 끝나고 선조와 대신들은 다시 경복궁의 주인이 되어 백성들을 가난과 절망으로 내몰았다. 이순신과 백성들이 목숨을 걸고 지켰던 결과치고는 참담하고 초라했다. 이순신은 비록 선조의 신하였지만, ‘선조가 만든 조선’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만일 이순신이 살아남아 새로운 조선을 꿈꿨다면 ‘이순신의 조선’은 백성이 가난과 질병, 차별로부터 보호받고, 조정이 백성 속으로 들어가는 조선이었을 것이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이순신의 승리는 여전히 경이롭다. 그 경이로움은 단순히 전투의 승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승전을 만든 과정과 치열함 그리고 참모와 병사, 백성에 대한 태도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부의 불평등, 가난에 의한 자살, 세월호 참사, 최장기 노동시간 등으로 국민들의 삶이 위태롭다. 민주주의가 흔들리고 있다. ‘사람의,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정부’를 말했던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이 아직도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것은 국가가 가야 할 길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우리사회는 여전히 문턱에 서있다. 이순신이 꿈꾸는 ‘백성의 조선’으로 갈 것인가, 선조가 꿈꾸었던 ‘왕의 조선’으로 갈 것인가. ‘12척의 조선’이라도 백성이 희망을 갖는 나라가 우리의 미래다.
 
양대웅 더플랜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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