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벗들을 가까이 두라, 너의 적들을 더 가까이 두라." 영화 <대부 2>에서 알 파치노가 남긴 명대사로 문을 여는 소설 <조선 누아르, 범죄의 기원>은 조선 시대에 국가 권력과 결탁해 활동한 조직 폭력 집단 '검계'의 이야기를 다뤘다. 영화 대사가 암시하듯 '이이제이'가 판치는 소설 속 권력 투쟁에서 현재 사회를 돌아볼 수 있고, 개인이 집단에서 살아남는 '씁쓸한' 방법도 엿보게 한다. 긴장감 있는 내용 전개 또한 돋보인다.
소설은 주인공 나용주가 남사당 광대로 살던 중 마포 검계의 두목 표악두의 눈에 띄어 검계가 된 뒤 벌어지는 일을 다뤘다. 소설 초반부는 인내를 가지고 읽어낼 필요가 있다. 주인공이 무수리의 아들인 호암군 이근의 호위 무사로 간 뒤부터 극 전개와 인물들의 갈등 구조가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표악두와 정치 세력은 나용주에게 이근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긴 뒤 차후에는 이근을 살리라는 새로운 임무를 수행하게 한다. 이처럼 중요한 임무를 맡고 승승장구하던 나용주는 주변의 의미 있는 조언을 듣고 고민한다. "두령이란 자리가 그런 거야. 언제나 변심을 하지. 조직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주인공은 주변인들이 저마다 속한 위치와 역할에 따라 탈을 쓰고 다가오는 데서 회의하게 된다. "이름 앞에 어떤 탈도 쓰지 않은, 나를 나로만 품어 주는 사람이 있긴 있는 걸까."라며. 진심을 가진 벗을 찾고 싶은 것이다. 이런 주인공에게 "형이라 부르라"며 다가온 표악두는 권력에 홀려 변심하고 나용주를 죽이려 든다.
이 과정에서 나용주는 나름의 깨달음을 얻는다. "세상에서 가장 힘센 자가 되리라. 그것만이 누군가의 개가 되지 않는 길이며, 이용만 당하다가 개죽음을 당하지 않는 길이다." 그의 결론이 가장 올바른 길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토사구팽'에 자주 직면하는 미생들은 이 대목에서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겠다. 소설은 "무리를 내세우는 자들을 의심하라"며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리의 장래가 아니라 너의 희생"이라고 다시 지적해준다.
소설은 나용주의 이러한 변화와 함께 갖은 수모와 위기를 극복하고 왕위에 오른 이근이 권력을 위협하는 붕당 세력을 척결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악(惡)으로 악을 응징한 국가 권력이 또 악을 낳는 구조와 인간의 탈을 쓴 인간에 대해서도 질문하고 있다. 이 소설을 토대로 만들 영화도 기대된다.
▶ 전문성 : 저자 김탁환은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황진이>, 영화 <조선 명탐정>의 원작자이고, 이원태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아름다운 TV 얼굴> 등의 프로그램을 기획·연출한 기획자다. 이들이 쌓은 전문성보다는 소설 자체의 흥미진진함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 대중성 : 소설을 읽으면서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가 떠올랐다. 왕과 정치 세력, 밀본의 무사 등이 벌이는 대결 구도가 닮았다. 사극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 참신성 : 이 책은 소설가 김탁환과 기획자 이원태가 결성한 창작 집단 '원탁'의 첫 번째 장편소설로 '무블'이란 새로운 장르를 표방하는 점이 참신하다. 무블(movel)은 영화(movie)와 소설(novel)을 합한 조어로 영화 같은 소설, 소설 같은 영화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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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약
소설은 금주령이 내려진 조선 시대 말을 배경으로 국가 권력과 결탁해 활동하는 조직 폭력 집단 '검계'의 이야기를 다뤘다.
남사당 광대로 자란 주인공 나용주는 마포 검계의 두목 표악두의 눈에 띄어 검계의 일원이 된다. 표악두는 자신과 밀월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집권 세력 '갑론'과 계획해 나용주를 천출 소생 왕자인 호암군 이근의 호위 무사로 보낸다. 이근을 감시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공을 독차지하려는 표악두는 나용주를 공격한다. 나용주는 위기에서 벗어나 한양 검계를 통합한 두목이 된다.
한편, 이복동생인 세자와 왕이 갑자기 죽은 뒤 왕위에 오른 이근은 검계와 결탁해 왕위를 위협하는 갑론은 물론 기존 붕당 세력까지 정리한다.
소설은 왕의 이 같은 행보에 나용주가 암약하는 과정을 그리면서 권력·개인·집단의 의미에 대해서도 고찰한다.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까지 던지고 있다.
■ 책 속 밑줄 긋기
"이름이 전부인 세상에서 이름 없이 사는 이의 자신감이 부러웠다. 이름을 떨치기도 어렵지만 지우기는 몇십 배 더 용기가 필요하다."
"튀면 빨리 죽고 참으면 오래 산다."
"상황이 상황인 데서 진짜 의리가 나오는 거야."
"누구에게도 진심을 털어놓으면 안돼. 믿지는 말고 발걸음만 맞춰라."
"앎은 곧 권력이다."
"파당을 이룬 무리의 이름 따윈 중요하지 않다. 갑론이든 을론이든, 병론이든 정론이든 혹은 노론이든 소론이든, 권력을 탐하긴 마찬가지다."
"두령이란 자리가 그런거야. 언제나 변심을 하지. 조직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학문을 뽐내는 것은 그 순간엔 기쁨일지 모르나 젊은이의 어리석음이다."
"벗을 사귀는 데 노소와 귀천이 있을 수 없지."
"이름 앞에 어떤 탈도 쓰지 않은, 나를 나로만 품어 주는 사람이 있긴 있는 걸까."
"요즘 개들은 믿음을 주지 않는 주인을 떠나기도 합지요."
"세상에서 가장 힘센 자가 되리라. 그것만이 누군가의 개가 되지 않는 길이며, 이용만 당하다가 개죽음을 당하지 않는 길이다."
"무리를 내세우는 자들을 의심하라!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리의 장래가 아니라 너의 희생이다."
"민심은 저절로 생겨나기도 하지만 또한 만들어 낼 수도 있다. 다짜고짜 민심부터 들먹이는 이를 경계하라. 천하의 바보거나 희대의 사기꾼이다."
별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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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훈 문화체육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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