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어주는기자)'일의 시간'이 아닌 '다른 시간'에 대한 고찰
<시간의 향기> 한병철 지음 |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펴냄
2014-11-17 09:33:45 2014-11-17 09:33:54
 
시간에도 향기가 있을 수 있다? 문학적 뉘앙스가 물씬 풍기는 제목이지만 <시간의 향기>는 철학서적 내지는 문화비평서에 해당한다. 저자는 <피로사회>라는 책으로 독일은 물론 한국에서 단숨에 유명세를 탄 한병철 베를린예술대 교수다. 국내의 경우 발간이 늦었지만 이 책은 사실 <피로사회>의 전작이다. 두 책은 '활동적 삶'의 폐혜를 언급하고 그 대안으로 '사색적 삶'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러나 관점이 살짝 다르다. <피로사회>가 현대사회 속 긍정성의 과잉과 성과주의를 지적하는데 초점을 맞췄다면 <시간의 향기>는 시간의 위기, 시간의 질병에 집중해 고찰한다.
 
쳇바퀴 도는 듯한 일상을 사는 범인(凡人)들이라면 저자의 시각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리라. 저자가 보기에 시간은 피로사회의 인질로 전락해버렸다. 모든 시간은 일의 시간일 따름이다. 저자는 일의 시간 혹은 일하기 위해 쉬는 시간, 이 두 가지가 우리 삶을 구성하고 있는 전부라고 지적한다. 잠도, 휴가도 일하기 위한 재충전 시간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안식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멈춰 서는 능력이 필요하다. 멈춰 서서 시간에 향기를 품을 기회를 줄 때 비로소 사색적 삶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실천으로 옮기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이미 시간은 일상에서 설 공간을 잃은 지 오래니까. 바삐 돌아가는 삶 속에서 나 홀로 삶의 리듬을 바꾸기란 쉽지 않은 일이니까. 결국 나혼자만 뒤쳐질까봐 무서우니까.
 
하지만 이 책을 덮을 즈음엔 삶에 브레이크를 걸 만한 용기가 조금 생긴다. 저자의 치열한 논리 전개 덕분에 머릿 속 생각 세포가 살아나고 바이오 리듬이 바뀌는 듯한 묘한 경험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시간에 향기를 주는 혁명'을 통해 궁극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결국 자아에 대한 믿음이다. 이 책은 방향을 잃고 조각나버린 시간의 파편들 속에서 벗어나 넉넉한 시간 속에서 머무름의 기술을 익히고, 마침내 삶의 형식을 바꿔내는 데 좋은 출발점이 되어줄 것이다.
 
▶전문성 : 182페이지의 짧은 책에 아리스토텔레스, 니체, 하이데거, 보드리야르, 리오타르, 아렌트 등의 철학자부터 뷔히너, 프루스트 등의 문호들까지 녹여냈다는 점이 놀랍다. 
 
▶대중성 : 짧은 책이지만 읽기가 쉽지 않다. 한 문장 한 문장에 저자의 사고가 농축되어 있고, 또 문장과 문장, 문단과 문단 사이를 넘어가는 데 구성력뿐만 아니라 상상력('시간의 향기'를 떠올려보자)까지 총동원해야 하기 때문이다. 
 
▶참신성 : 저자는 앞서 언급한 철학자들의 사상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그들의 논리를 조목조목 따지고 든다. 한나 아렌트가 이렇게까지 까일 줄이야.
 
 
■요약
 
불-시(Un-Zeit)
 
저자는 니체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언급한 ‘최후의 인간’을 재인용한다. 그리고 길고 건강한 삶, 하지만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삶은 결국 참을 수 없는 것이 된다고 역설한다. 죽음이란 ‘종결의 형식’인데, 의미 있는 종결의 형식을 빼앗긴 삶은 결국 불시에 중단될 수 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또한 하이데거 역시 니체와 마찬가지의 시각에서 시간이 점과 같은 현재의 단순한 연속으로 허물어지는 데 맞선 철학자로 언급된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경우에는 삶과 시간에 대한 고찰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좋은 예로써 인용된다.
 
그런데 저자는 시간 문제를 다루면서도 흥미롭게도 가속화의 테제를 거부한다. 저자가 보기에는 극히 짧은 삶도 충만한 삶의 이상을 달성할 수 있다. 진짜 문제는 오늘날 삶이 의미 있게 완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새로이 시작하고 ‘삶의 가능성들’ 사이에서 불안하게 우왕좌왕하며, 삶은 결코 안식과 완결에 이르지 못한다. 또 삶이란 어느 정도 넓이가 있어야 지속성도 지닐 수 있는데 요즘의 삶은 극단적으로 고립되고 원자화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 때문에 삶 속에는 세계가 거의 담겨있지 않다는 것이다. 삶은 정말로 빨라졌다기보다는 더욱 분주해졌고 삶에 대한 전체적인 파악과 방향 설정이 어려워졌다. 그야말로 적절한 시간(적시)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린 불시의 시대다.
 
향기 없는 시간
 
신화적 세계는 의미로 가득했기 때문에, 마치 그림처럼 읽을 수 있었다. 이후의 역사적 세계는 그림이라기보다는 선의 세계였다. 한 방향을 바라보며 혁명을 만들어내는 시대, 시간을 제어하는 시대였다. 그런데 이제 역사 혹은 이야기 세계는 바야흐로 정보 세계로 대체되고 있다. 선이 점으로 흩어지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점과 점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공허가 있으며, 그래서 정보에는 향기가 없다고 주장한다. 원자화된 시간. 파편화된 시간은 존재의 본질적 결핍을 만회하기 위해 황급하게 내달린다. 하지만 가속화가 안정적인 받침대를 만들어내진 않는다. 가속화는 오히려 기존의 존재 결핍 상태를 극명하게 드러낼 뿐이다.
 
역사의 속도
 
저자는 보드리야르를 비롯해 많은 철학자들이 내세우는 가속화의 이론들이 의심스럽다고 말한다. 가속화가 아니라 방향감각의 부재, 박자의 부재가 문제라는 것이다. 즉, 저자가 보기에는 탈시간화가 문제다. 탈시간화로 인해 서사의 진전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서술자는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별할 수 없기 때문에 극히 사소하고 하찮은 사건에도 오래 머무르게 된다는 분석이다. 저자는 탈시간화로 인해 모든 서사적 긴장이 소멸되고, 사건들은 이야기되기보다는 나열될 뿐이라고 말한다. 결국 불시의 중단이 의미 있는 종결을 대체한다.
 
행진의 시대에서 난비(亂飛)의 시대로
 
근대까지만 해도 목적지향적이었으나 후근대(포스트모던)에서 삶은 어지럽게 날아다닌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는 인류의 미래를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는다. 인간은 짧은 난비의 단계를 넘기고 다시 걷는 자로서 땅 위로 돌아올 수도 있고, 땅 혹은 노동의 무거움을 던지고 아예 가볍게 유영하며 부유하는 시간의 향기를 발견할 가능성도 있다.
 
현재의 역설
 
저자가 보기에는 우리가 전적으로 목표에만 집중한다면 길의 풍부한 의미는 사라진다. 공간과 시간이 더 이상 많은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현재를 중시하는 태도가 ‘사이의 상태’를 없앨 수 있는데, 인생은 모든 사이가 제거되고 나면 그만큼 더 빈곤해진다고 말한다. 세계가 온통 ‘여기’가 됨으로써 ‘저기’는 제거되고, 여기의 가까움이 먼 곳의 아우라를 소멸시킨다는 것이다. 현재의 역설은 바로 모든 것이 다 현재가 된다는 데 있다. 이는 사색 속의 머무름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한다. 사람들이 채널을 막 돌리듯 세계를 폴짝폴짝 돌아다니는 것도 이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향기로운 시간의 수정(水晶)
 
다시 소설가 프루스트 이야기다. 저자는 조급성의 시대에 맞선 프루스트의 시간 전략의 핵심은 시간이 다시 지속성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 시간이 다시 향기를 발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인간 삶의 탈시간화 과정이 진전되면서 결국 삶을 분해해버릴 지경에 온 상황에 대한 대응이라는 설명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해체될 위기에 처한 자아의 동일성을 다시 안정화시키려는 시도라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도 위 소설의 한 구절에서 착안한 듯하다. “고요한, 맑은 울림과 향기를 지닌, 투명한 시간들”의 “수정(水晶)”. 사물의 아름다운 정수를 구성하는 성분은 다름 아닌 잔광을 발하는 시간의 침전물이다.
 
천사의 시간
 
철학자 리오타르는 서사적 시간의 종언이야말로 ‘존재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이고, 결국 ‘존재의 증대’로 귀결된다고 본다. 하지만 저자는 리오타르의 이 같은 시각을 비판한다. 리오타르가 말하는 존재의 신비는 오직 ‘거기 있음’의 신비일 뿐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 같이 존재의 깊이만을 강조하는 것은 동시에 존재의 절대적 빈곤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존재의 심연 앞에 높인 사건의 시간은 삶의 시간, 즉 거주의 시간이 아니라는 관점이다. 이어 서사적 시간의 종언이 필연적으로 연명의 시간으로 귀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저자는 서사적이지도 않고, 단순한 생존에 그치는 것도 아닌 삶의 시간, 테마와 트라우마 너머에 자리 잡고 있는 삶의 시간이 있을 것이라며 낙관적 시선을 계속 유지한다.
 
향기로운 시계: 고대 중국으로의 짧은 여행
 
중국에는 향인이라고 불리는 향시계가 있었다고 한다. 도장처럼 생긴 이 시계는 나무에 문양을 새기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는데, 그 속에 들어 있는 향이 다 타들어가면서 글자의 모양이 드러난다. 저자는 이 향인을 비움으로서 정신을 욕망에서 해방하고 시간에 깊이를 주는 것의 상징으로서 언급한다. 그리고 정신이 가만히 서 있을 때, 정신이 자기 안에 편안히 머물러 있을 때, 좋은 시간이 생겨난다고 말한다.
 
세계의 윤무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의 시간 철학은 그가 속한 시대에 결부되어 있다. 저자는 우리가 사는 현재의 시대를 ‘현존재 속에는 본성적으로 가까움을 향한 경향이 있다’는 하이데거의 시각, 다시 말해 ‘먼 거리의 극복을 독려하는 경향’, ‘빠름의 경향’으로만은 설명할 수 없다고 본다. 하이퍼링크, 전자우편의 경우처럼 새로운 미디어가 공간 자체를 철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후기 저작에 이르러서야 점점 역사적 시간 모델과 멀어져 간다. 즉, 역사적 시간의 반대 이미지인 ‘왕복의 이미지’를 언급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로써 비로소 지속성이 생겨난다.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지 않는 왕복운동은 길을 목표에서 해방시키면서도 그렇다고 산만성의 파괴적 힘에 내던져버리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의미 있게 다가온다.
 
떡갈나무의 냄새
 
하이데거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학자답게 저자는 계속해서 하이데거의 사상을 알기 쉽게 풀어쓴다. 저자에 따르면 하이데거는 지속성을 수립하기 위한 시간 전략으로서 보존의 전략을 구사한다. 새로운 것에 대한 강요에 맞서 “늘 같은 것”을 앞세운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존재”는 시간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 “떡갈나무의 냄새”는 바로 이런 길고 느린 것의 향기를 상징한다. 저자가 보기에 하이데거는 다른 시간으로 가는 길 위에 있다. 노동의 시간이 아니라 길고 느린 것의 시간, 머무름을 가능하게 만드는 시간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노동은 사물과의 거리를 제거하는 반면 사색적 시선은 사물을 지켜준다. 저자는 이러한 오랜, 사색적 시선이 사물을 바라볼 때 사물과의 거리를 지키면서도 그것에 대한 가까움 또한 잃지 않게 해준다고 설명한다.
 
권태
 
뷔히너의 희곡 <당통의 죽음>에서 당통은 혁명의 와중에 깊은 권태에 빠진다. 결연하게 행동하는 인간들이 주역으로 등장하는 혁명의 시대에 역설적으로 깊은 권태가 유령처럼 찾아든다. 저자는 역사와 혁명의 시대, 많은 사건이 일어나고 지속성과 반복의 상태에서 이탈한 이 시대야말로 권태에 취약하다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바로 이처럼 자기 자신을 위한 의미를 고안해내기 위해 과도하게 애쓰는 태도에서 깊은 권태의 징후를 발견한다. 시간을 의미 있게 해줄 어떤 시간적 분절도 이뤄지지 못한다는 게 문제라는 시각이다.
 
그러나 저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강력한 행동의 요구, 적극적 행동을 향한 결단, 개시의 자유야말로 시간의 공허를 초래한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후기의 하이데거가 행위의 강조를 철회하고 “느긋함” “머뭇거림” “수줍음” “자제” 등에 주목하는 대목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에게 동조한다. 깊은 권태의 원인은 행위의 결단에 완전히 장악당한 삶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저자는 강박적 활동주의에 반기를 든다. 그리고 깊은 권태의 저주는 활동적 삶이 위기의 끝자락에서 다시 사색적 삶을 받아들일 때 풀릴 수 있다고 말한다.
 
사색적 삶
 
한가로움의 역사는 짧다. 중세까지만 해도 사색적 삶은 여전히 활동적 삶에 비해 우선권을 누리고 있었다. 중세 후기에 이르러 일에 대한 태도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토마스 모어는 모두가 일하는 세계에 대한 상상을 펼치고, 루터는 직업으로서의 일을 인간을 향한 신의 부름과 연결시킨다. 프로테스탄티즘의 현세적 금욕주의는 일과 구원을 결합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마침내 산업화가 도래한다. 기계화로서의 산업화는 인간의 시간을 기계의 시간에 동화시키려 한다. 이른바 여가사회, 소비사회도 일이라는 지상명령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래서 저자는 이 대목에서 '노동사회의 궁극적 목적이 삶의 필수적 요구라는 족쇄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라는 한나 아렌트에 대한 비판을 미리 암시한다.
 
저자는 이어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설파한다. 역사가 완결되는 사회는 다름 아닌 누구나 일하는 사회, 누구나 오직 일만 하는 사회다. 노동의 전면적 지배는 역사의 완결과 함께 모든 사람을 노동자로 만든다. 노예는 주인의 지배에서 해방되기는 하지만, 그 대가로 일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 모든 것이 노동이어야 하며, 노동이 아닌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저자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완전한 자유의 변증법이 되기 위해서는 노동 너머의 차원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이후 한나 아렌트가 주창한 '활동적 삶'을 비판하면서 자신이 주장하고자 하는 '사색적 삶'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먼저 저자는 아렌트가 저서 <활동적 삶>에서 사색이 모든 운동과 활동의 정지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즉, 존재는 활동한다는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더 나아가 오히려 사유는 사색적이기 때문에, 모든 활동 가운데 가장 활동적일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활동적 삶>의 끝부분에서 아렌트가 사색적 삶에 손을 들어주는 것처럼 마무리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저자는 본래의 의도와는 다른 마무리이며 그 한계가 분명하다고 평가한다. 사색하는 능력의 상실이야말로 인간이 일하는 동물로 퇴화하게 된 주요 원인이라는 것을 아렌트가 끝내 인식하지 못했다는 비판이다. 
 
저자가 궁극적으로 주장하는 바는 활동적 삶과 사색적 삶을 매개하려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노력과 유사한 면이 있다. 저자는 행동 없는 사색적 삶은 공허하고 사색 없는 행동적 삶은 맹목적인 것으로 본다. 가쁜 숨을 헐떡이는 사람에게는 정신이 있을 수 없으며, 노동의 민주화에 이어 한가로움의 민주화가 도래해야 한다는 것이다.
 
■책 속 밑줄긋기
 
“오늘날 필요한 것은 다른 시간, 일의 시간이 아닌 새로운 시간을 생성하는 시간 혁명이다.
시간에 향기를 되돌려주는 시간 혁명.”

“사색적 머무름은 시간을 준다. 그것은 존재를 넓힌다.
활동하는 것 이상의 존재가 되도록.
삶은 사색적 능력을 회복할 때, 시간과 공간을, 지속과 넓이를 얻을 것이다.”

“모든 사색적 요소가 추방되어버린 삶은 치명적인 과잉활동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 자신의 행위 속에서 질식할 것이다.
사색적 삶을 되살려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삶만이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열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의 민주화에 이어 한가로움의 민주화가 도래해야 한다.
그래야만 노동의 민주화가 만인의 노예화로 전복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별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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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 김희영 옮김 | 민음사 펴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 강두식 옮김 | 동서문화사 펴냄
<존재와 시간> 마르틴 하이데거 지음 | 이기상 옮김 | 까치 펴냄
<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 천병희 옮김 | 숲 펴냄
 
김나볏 문화체육부 기자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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