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한 십자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 이선희 옮김 | 자음과모음 펴냄
살인죄를 씻을 수 있을까?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일본의 추리소설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공허한 십자가>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책이다.
크게 세 가지 살인을 둘러싼 인물들의 고민과 판단을 11년을 넘나들며 묘사한다. 갓 태어난 아들을 죽인 중학생 부모, 초등학교 2학년 딸을 강도로부터 살해당한 부모, 사위의 비밀을 폭로하려는 사람을 죽이는 장인 등이다. 이들의 관계는 복잡하게 엮여 있다.
죄지은 이들은 속죄의 방법을, 당한 이들은 극복의 방법을 각자 찾고 있다. 그러면서 사형, 자살, 갱생 등 속죄의 방법이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 제기된다. 예컨대 살인범이 20년간 속죄했다면 죄는 사라지고, 피해자도 회복이 되는지. 진정으로 속죄한 것인지 증명할 수 있는지. 죄를 덮는 게 다수에게 이롭다면 그것이 옳은지. 사형은 추가 살인을 막는 용도에 불과한지.
답이 나오진 않는다. 사건에 얽힌 사람들의 기구한 사연을 전하면서 죄의 무게를 재도록 하는 가혹한 시간을 독자에게 남겼다. 피해자의 고통이 희미해질 정도로.
▶ 전문성 : 책은 살인과 사형제도, 속죄를 주로 말하면서 '생명의 탄생부터 끝'까지도 다뤘다. 남녀의 만남과 사랑, 섹스, 임신, 낙태, 출산, 결혼, 이혼, 재혼, 살인, 사형, 자살 등이 그것이다. 이런 주제에 대해 고민해본 적이 있다면 좋겠으나, 지금도 많이 늦진 않았다.
▶ 대중성 :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독자가 이 책을 읽으면 여운이 더 클 것 같다. 프롤로그에서 전하는 이야기를 책을 다 읽을 때까지 기억하면 좋겠지만, 나중에 그 부분을 또 읽는다고 누가 뭐라고 하진 않으니 걱정은 말라.
▶ 참신성 : 책을 덮고 어떤 주제를 생각하게 만들다가 책을 손에서 놓기 힘들게도 하는 등 리듬이 오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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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
이구치 사오리는 중학교 2학년 때 한 살 많은 니시나 후미야로부터 이와 같은 말을 듣는다. 사오리는 그 말을 듣고 난 뒤 후미야의 아이를 임신하지만, 출산 직후 그와 함께 아들을 죽인다. 여중생의 배가 부풀어 오르기까지 모른척한 주변 사람들은 어린 부부의 살인과 무관하지 않다.

사오리는 출산 이후 후미야와 헤어진다. 죄책감에 시달린 그녀는 자살을 시도하다가 도벽을 갖게 되고 유흥업소에서 남자들을 상대하는가 하면 겨우 시작한 결혼 생활도 파경을 맞는다. 아버지까지 화재로 잃는다.
그녀는 임신 당시 후미야가 걱정할까봐 한참 뒤에 사실을 알린다. 사오리는 후미야의 장인이 사위를 위해 살인자가 된 점도 걱정하며 살인 사실을 함구하기로 한다. 아들을 살인한 이후 십자가를 무겁게 짊어지고 살아가면서 사랑도 이어간 셈이다.
후미야도 갱생의 삶을 살아간다. 그는 소아과 의사가 되어 다른 아이를 살리는 일을 하며 미혼모와 결혼했다. 그 미혼모는 사오리와 상당히 닮았다.
책은 이런 이야기 줄기에 다른 가족의 사연이 끼어들게 한다. 나카하라와 그의 부인 사요코가 강도에게 딸 마나미를 잃은 사연이 그것이다. 사요코는 딸이 살해당한 뒤 후미야와 이혼하고 프리랜서 작가로 일하며 '사형 폐지론이라는 이름의 폭력'이라는 원고를 준비하면서 사오리의 이야기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사요코는 딸의 죽음 당시 범인이 사형되길 그토록 바랐으나, 각종 이유로 형량이 줄어드는 현실을 지켜봐야 했다. 특히 범인이 사형당해도 뉘우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형이 무력하다'는 지적에 직면한 뒤에 이런 일을 시작하게 된다. 사형이라도 이뤄져야 슬픔에서 일단 벗어나 새로운 일을 도모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한 일 때문에 살해 당한다.
현실에서 사형 제도는 정치적 악용과 오류 가능성 탓에 재고되고 있다. 또한 중요한 건 '책임 의식'일 것이다. 책은 이런 것을 따지는 방식 대신 다양한 인물 속에 녹아 있는 이야기를 통해 사랑과 살인, 사형, 속죄, 생명에 대한 진지한 생각을 독자들에게 묻고 있다. 여운이 진하다.
책 속 밑줄 긋기
그녀의 목적은 도둑질이 아니라, 그것에 의해 처벌을 받는 것이 아닐까?
범죄자를 일정 기간 복역시켜서 범죄를 막는다는 발상 자체가 환상이 아닐까. 국가의 책임 회피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런 형벌 시스템은 한시라도 빨리 재고해야 한다고 이번 취재를 통해서 통감했다.
사형은 무력합니다.
가석방은 결국 교도소가 가득 찼다는 이유만으로 이루어지는 무책임한 행위일 뿐이다.
대체 누가 '이 살인범은 교도소에 몇 년만 있으면 참사람이 된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살인자를 공허한 십자가에 묶어두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람을 죽이는 사형에 처한다. 이 판단의 최대 장점은 그 범인은 이제 누구도 죽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심호흡을 했다. 토해낸 숨결이 하얗게 흩어졌다.
사건은 전혀 별개이고 유족의 면면도 다른데, 결론은 사형이라는 한 가지로 처리되어버리지요. 난 각각의 사건에는 각각에 맞는 결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누구 한 사람 태어난 걸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심지어 그들의 부모조차도 낳은 걸 후회하지 않지요.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생명의 무게는 똑같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내 생명이니까 어떻게 하든 내 마음이라고 여길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의 생명은 당신 한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이미 돌아가셨다고 해도 부모님 것이기도 하고, 그렇게 친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당신이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것이기도 하지요. 아니, 이제 내 것이기도 합니다. 당신이 죽으면 나도 슬플 테니까요.
담배가 수명을 줄인다면, 빨리 이 목숨을 빼앗아 가면 되지 않는가.
주변의 무관심도 한몫한 거죠.
당신도 아이가 있잖아요. 누군가가 그 아이를 죽였다고 생각해보세요. 그 아이를 죽인 사람이 20년간 반성했다면, 당신은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나요?
사람을 죽인 사람의 반성은 어차피 공허한 십자가에 불과한데 말이에요.
교도소에 들어가도 반성하지 않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어요. 그런 사람이 등에 지고 있는 십자가는 아무런 무게가 없을지 몰라요. 하지만 남편이 지금 등에 지고 있는 십자가는 그렇지 않아요. 너무나 무거워서 꼼짝도 할 수 없는, 무겁고 무거운 십자가예요.
당신이 지금 자수해서 감옥에 가면 뭐가 좋지? 그냥 마음 편하자고 하는 짓이잖아?
동물을 좋아하지만 뱀은 예외인 것이다.
별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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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훈 문화체육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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