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총 20조원 규모로 조성할 계획인 자본확충펀드에 은행들이 신청을 기피해 펀드 출범 전부터 엇박자가 나고 있다.
정부는 펀드의 지원으로 자본을 확충한 은행들이 기업 유동성 지원과 구조조정에 속도를 내줄 것을 기대했으나 당초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은행들은 자본확충펀드에 의존하면 '부실 은행'이라는 오해를 받을 수 있고 정부의 경영간섭을 피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스스로 자본을 늘리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 은행들 펀드지원 신청 기피
8일 금융업계에 따르면 우리은행과 광주은행, 경남은행 등 정부가 대주주인 우리금융지주 소속 은행들만 자본확충펀드의 지원을 신청할 것으로 예상된다.
농협과 수협도 펀드지원을 신청할 가능성이 있으나 두 은행은 당초 금감원의 자본확충 권고대상이 아니었다.
국민과 신한, 하나 등 대형 시중은행은 자체 자본확충을 통해 금감원의 국제결제은행(BIS) 기본자본비율 권고치인 9%를 달성해 지원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부산.대구.전북.제주 등 지방은행들도 대체로 자력으로 자본을 확충할 방침이다.
이에 따라 20조 원 범위에서 운용될 자본확충펀드는 우선 수조 원으로 출범할 것으로 보인다.
이 펀드는 한국은행이 투자금액의 절반을 낮은 금리로 대출해 주고 산업은행과 기관투자자들이 나머지 절반을 출자해 은행이 지원을 요청할 때마다 자금을 투입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통안증권 발행금리 수준에서 대출금리가 결정될 공산이 크다"고 말했다. 이달 6일 기준 1년물 통안증권 금리는 2.96%다.
◇ 은행에 유리하게 자산매입 가능
투자자금의 절반을 저금리로 대출 받기 때문에 은행이 자본확충을 위해 발행하는 상환우선주와 신종자본증권, 후순위채 등을 은행에 유리한 조건으로 사들일 수 있다.
상환우선주는 5년 이후에 주식발행 기업이 주주에게 약정금액으로 상환할 의무를 지니는 주식이며 상환기간이 30년 이상인 것은 기본자본, 30년 미만은 보완자본으로 인정받는다.
신종자기자본증권은 채권처럼 매년 확정이자를 받을 수 있고 주식처럼 만기가 없으면서 매매가 가능하다. 이 증권은 만기 30년 이상시 기본자본으로 인정된다. 채권행사 순서가 가장 늦어 금리가 높은 후순위채도 만기가 5년 이상일 때만 보완자본으로 간주된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은행이 발행하는 우선주와 채권을 시장금리보다 다소 낮게 인수해도 투자자에게 은행채보다는 낮지만 국공채보다는 높은 수익률을 제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금융위원회는 채권시장안정펀드와 마찬가지로 자본확충펀드도 펀드오브펀즈(Fund of fund) 방식으로 운영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모펀드 아래 여러 개의 자펀드를 두고 우선주와 후순위채 등 투자자산을 구분, 운영하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투자자산별 만기불일치 문제를 해소하고 유동성을 높인다는 것이다.
◇ 은행들 "경영권 간섭 두려워"
이처럼 펀드가 은행에 유리한 조건으로 자본확충에 필요한 주식과 채권을 사들일 수 있는 데도 신청을 기피하는 이유는 경영권 간섭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은행들이 정부의 해외차입 지급보증을 받으면서 실물경제 지원과 경영효율화 등을 내용으로 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경험이 있다.
은행권의 한 관계자는 "펀드지원을 신청하면서 경영권 간섭을 받을 것이라는 우려로 인해 은행들이 연말까지 자본확충에 열을 올렸다"며 "아직 금감원의 권고치인 자기자본 BIS 비율 9%에 도달하지 못한 일부 은행들도 가능하면 자체적으로 해결하려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이에 대해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펀드지원을 신청하는 은행과 MOU를 체결할지 여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고 펀드를 통한 자본확충 규모 수준에서 실물경제 지원을 약속 받는 정도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금융위는 은행들이 지금은 펀드지원을 신청하지 않더라도 올해 상반기 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건전성이 악화되면 신청하는 곳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 관계자는 "자체적으로 자본을 확충할 수 있는 은행은 펀드지원을 신청할 필요가 없다"며 "당초 펀드규모를 20조원으로 설정한 것은 은행들이 기업 유동성 지원과 구조조정을 할 수 있는 여력을 충분히 확보하려는 의도였다"고 설명했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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