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동두천시 소요산 입구 한쪽에는 세간의 무관심 속에 수십년을 버텨온 낡은 건물 하나가 서 있습니다. 미군 기지촌 여성들을 대상으로 했던 옛 성병관리소 건물인데요. 소요산 관광지 개발사업이 추진되면서 곧 철거될 처지에 놓였습니다. 하지만 시민단체들은 국가의 여성 인권침해 현장으로, 근현대사 유적으로 이 건물을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유엔(UN) 인권이사회에 진정서를 내며 건물 철거에 반대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토마토Pick에서 이 건물의 역사와 의미를 짚어봤습니다.
여성 인권침해 현장
개발사업으로 철거 위기
정부는 과거에 기지촌 반경 2㎞ 이내에서 성매매를 허용하고 성병관리소까지 운영했습니다. 사실상 국가가 성매매를 조장했다는 지적을 받았는데요. 동두천시에는 한국전쟁 이후 1953년부터 2019년 말까지 주한미군의 육군기지가 주둔했습니다. 당시 동두천시 일대에는 미군을 상대로 한 성매매 업소가 한때 200여곳이나 될 정도로 많았다고 합니다. 1970~80년대 군사독재 시절, 국가는 이들을 ‘애국자’나 ‘민간외교관’이라 추켜세우며 성매매를 독려한 바 있습니다.
-28년째 방치된 건물 : 정부는 성병관리소도 운영했는데, 주로 미군 기지촌 여성들이 대상이 됐습니다. 경기도 미군 주둔지역에 존재하던 성병관리소 6곳은 1990년대 이후 운영이 중단됐습니다. 그중 1996년 폐쇄된 동두천 성병관리소만 아직 건물이 남아 28년째 방치돼 있습니다. 이 건물은 1973년에 완공돼 23년 동안 운영됐습니다. 부지면적 6766㎡에 2층짜리 시설로 지어진 이 건물은 방 7개에 140명까지 수용이 가능했습니다. 미군 위안부 여성들의 성병을 검사하며 낙검자 수용소 역할을 했던 성병관리소에서는 여성들을 강제 감금하고 페니실린을 과다 투약하면서 위안부 여성들의 생명에 위협을 가한 여성 인권침해의 역사적 현장이기도 합니다.
-"상징적 건물" 보존 목소리 : 동두천시는 지난해 2월 29억원을 들여 건물과 부지를 매입하고 호텔과 테마형 상가 등을 짓는 소요산 일대 개발 관광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지역경제 활성화를 도모한다는 취지로, 소요산 초입에 위치한 옛 성병관리소를 연내 철거한다는 계획입니다. 시민단체들은 수천억원이 소요될 동두천시의 소요산 관광지 개발사업이 예산 마련 방안이나 공청회 없이 철거 계획부터 세우고 있다며 반발했습니다. 무엇보다 동두천 옛 성병 관리소 건물은 전쟁과 군사주의의 피해를 상징하는 근현대 역사 유적으로 보존돼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미군 위안부 문제
대법서 국가 폭력 인정
참여연대와 정의기억연대 등 59개 시민사회단체들은 지난달 12일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 철거 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발족했습니다. 이들은 “동두천의 옛 성병관리소는 흉물로 치부해 철거할 대상이 아니다”라며 “지어진 지 50년이 넘은 근현대 문화유산으로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근현대사의 아픈 과거를 보여주는 상징적 공간으로 남아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주한 미군 위안부 문제는 국가가 주도해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하고 폭력을 휘두른 사건으로 국가에 명확한 법적 책임이 있다고 인정받은 바 있습니다. 시민단체들은 민변 여성인권위원회와 미군문제연구위원회를 중심으로 지난 2011년부터 이 문제를 제기해 왔습니다. 2014년 5월, 60~70대 고령의 피해자 122명이 국가에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고, 8년3개월이 지나 2022년 9월 대법원은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확정했습니다. 미군 위안부 여성에 대한 국가폭력을 대법원이 처음 인정했고, 현재는 경기도 조례에 근거해 이들에 대한 보호와 지원도 이뤄지고 있습니다.
더구나 지난 2020년 경기도여성가족재단이 시행한 ‘기지촌여성 생활실태 및 지원정책 연구’는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 건물에 대해 '경기도가 구입해 경기도여성인권평화박물관으로 조성하라'는 권고안을 낸 바 있습니다. “한국사에 기록될 만한 가치가 있는 건조물로, 근대건축문화유산으로 등록해 보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 것입니다. 동두천시의 철거 계획에 반대하는 공동대책위가 한국 여성인권의 역사적인 장소를 대책 없이 지우려 한다고 비판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성찰하고 반성해야 할 역사"
공동대책위는 소요산 관광지 개발이 경제적 타당성이 없고 지역의 역사와 생태에 대한 배려도 없는 사업이라고 반발하고 있습니다. 수천억원이 소요되는 개발사업을 두고 동두천시가 예산 마련을 위한 명확한 방안도 수립하지 않은 채 주민 공청회도 한 번 열지 않았다고 비판합니다.
또 멸종위기종인 하늘다람쥐와 수리부엉이가 서식하는 소요산의 생태적 고려가 사업추진 과정에서 무시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소요산이 적색 관심종인 꼬리치레도룡뇽의 국내 최대 서식지일 가능성이 크다는 조사 결과도 있고, 멸종위기 2급종이었다 얼마 전 해제된 독중개의 서식지이기도 합니다.
근현대 문화유산이 위치한 지역의 개발은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특히 치밀한 사전 검토 없이 철거부터 진행하는 개발은 회복할 수 없는 역사·환경 파괴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정부가 지난 15일부터 새롭게 시행 중인 ‘근현대문화유산의 보존 및 활용에 관한 법률’(근현대문화유산법)을 통해 체계적 관리와 적극적 보존에 나선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근현대문화유산법 제4조2항에 따르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각종 개발사업을 계획하고 시행하는 경우 근현대 문화유산이 훼손되지 아니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공동대책위는 지난달 성명에서 “미군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경험은 지워야 할 역사가 아니라 우리 공동체가 성찰하고 반성해야 할 역사로, 그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공간은 보존할 가치가 높다”며 “우리는 긴 세월 동안 기지촌 여성의 역사를 망각하고 역사의 진실에 침묵했던 과거를 반성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좀 더 진지한 숙고와 재검토가 필요한 때인 듯합니다.
안창현 기자 chah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