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드민턴 여자 단식 세계 랭킹 1위인 안세영 선수가 2024 파리올림픽 금메달을 딴 직후 인터뷰에서 그간 참아왔던 울분을 토해내는 장면은 낯설지만 인상적이었습니다. 안 선수의 발언은 의미심장했고, 많은 국민들의 시선을 끌어모으기에 충분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안 선수의 작심발언에 화답하듯 빠르게 움직였고, 진상조사 결과를 통해 안 선수의 주장은 구체적인 실체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토마토Pick이 지금까지 확인된 배드민턴협회의 실상을 짚어봤습니다.
안세영 폭로, 드러난 실상
2024 파리 올림픽이 진행되던 8월5일 안세영은 금메달을 딴 직후 언론과 인터뷰에서 '경기가 끝난 직후 포효는 어떤 의미인가'라는 질문에 "7년 동안 참아왔던 그런 분노, 설움, 또 환호, 이런 게 다 섞여있다"고 말했습니다. 안 선수가 세계 제패의 기쁨이 아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협회에 대한 불만'을 간접적으로 밝히면서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습니다. 이후 이어진 기자회견 자리에서 안 선수는 '협회와 어떤 일이 있었냐'는 질문에 "대표팀에 실망이 컸고,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며 "배드민턴 발전을 위해서 또 나의 기록을 위해 (배드민턴을) 계속하고 싶지만, 협회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고 거듭 협회를 겨냥했습니다. 안 선수가 이번 발언을 오래 준비해왔고, 상당한 각오와 결심을 하고 꺼낸 문제제기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습니다.
-부상 중 방청소 빨래까지 : 이후 언론보도를 통해 밝혀진 내용에 따르면 안 선수는 지난해부터 부상에 시달렸는데요. 이때 안 선수의 부모님이 대한배드민턴협회 관계자들과 만나 소속팀에서 재활을 할 수 있도록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당시 선수촌 내 생활 문제 개선도 언급했다고 합니다. 안 선수는 일부 선배들의 끊어진 라켓 줄을 갈아주고, 방 청소에 빨래까지 도맡아 하는 등 일과 시간이 끝난 후에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환경을 견뎌왔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안 선수가 중학교 3학년이었던 2017년 어린 나이로 처음 대표팀에 발탁된 뒤 7년 내내 막내 생활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협회와 대표팀, 무성의한 대처 : 문제는 협회와 대표팀 코칭스태프의 반응이었습니다. 협회가 당시 안세영 쪽과 면담을 가진 뒤 대표팀에 개선 의견을 전달했는데, 코칭스태프 등이 '당장 해결할 수 없다, 점진적으로 고쳐가겠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사실상 협회도 면피성으로 의견을 전달한 것일 뿐 곪은 부분을 방치한 셈입니다. 이제는 사라졌을 거라고 생각됐던 악습이 세계 최고의 선수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음이 드러나면서, 한국 스포츠계의 시대착오적인 민낯은 여론의 강한 질타를 받았습니다.
체육계 악습, 흔적은 여전
과거 체육계에서는 일종의 군기를 잡겠다며 빨래는 물론 폭행과 같은 폐습이 공공연하게 존재해 왔습니다. 국가대표 선수촌에서 벌어지는 강제적 집단 훈련에 대해 외신이 '병영 캠프'라고 비판한 적도 있죠. 이번 파리 올림픽을 앞두고 대한체육회는 지난해 12월 국가대표 선수들을 대상으로 해병대 병영 체험을 실시한 적이 있는데요. 이 역시 체육계에 남은 구습의 흔적이라는 점에서 여론의 따가운 질책을 받았습니다. "한국 체육계는 여전히 19세기적 관행에 머물러 있고, 선수들만 21세기에 와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안세영 선수의 작심 발언이 나온 뒤 강유정 민주당 의원이 대한체육회를 질타하며 한 말인데요. 현 체육계 상황을 잘 표현한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배드민턴협회의 민낯
안세영 선수의 폭로에 화답한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 10일 대한배드민턴협회를 상대로 감사를 진행한 중간 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임원들 횡령,배임 가능성" : 우선 배드민턴협회가 국고 지원 사업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후원사로부터 추가 물품(약 1억5000만원 상당)을 받는 구두계약을 체결하고, 이를 협회장 지역 등에 임의 배분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현재까지 문체부가 파악한 상황만으로도 협회가 보조금 관리에 관한 법률을 위반했고, 회장을 비롯한 임원들의 횡령 및 배임 가능성도 언급했는데요. 일례로 협회 임원은 보수를 받을 수 없음에도 협회 부회장과 전무는 마케팅 규정을 이용해 후원사 유치에 기여했다는 명목으로 총 6800만원의 인센티브를 지급받은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협회 감사가 대표이사로 재직 중인 회계법인에 장부 작성 등의 명목으로 1600만원을 지급한 사실도 드러났습니다. 후원사가 선수들에게 직접 보너스를 지급하던 방식이 2019년 이후 협회가 받아서 주는 방식으로 바뀌었는데, 정작 선수단은 보너스의 존재를 모르거나, 제대로 지급받지 못한 것으로 나타나 추가 조사가 이뤄질 전망입니다. 문체부는 이미 협회장에 대한 고발사건이 수사기관에 접수돼 추가 조사를 마치는 대로 수사 참고자료로 제공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불합리한 제도 개선 추진도 : 이와 함께 문체부는 라켓이나 신발처럼 경기력과 직결되는 용품은 선수의 결정권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후원사와 개선을 협의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또 국가대표가 아닌 선수의 국제대회 출전을 막는 것 역시 직업 행사의 자유를 제한한다며 폐지를 추진하기로 했습니다. 신인 실업 선수의 계약 기간과 연봉을 제한하는 규정 역시 연봉을 하향 평준화하고 실업팀 이익에만 부합하는 제로라고 판단해 최대한 빨리 대안을 도출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문체부는 국제대회 참가 등으로 면담하지 못한 국가대표 선수단의 의견까지 수렴해 9월 말 최종 조사 결과를 발표한다는 방침입니다.
모범사례 된 양궁협회
물론 모든 체육협회가 불합리한 관행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하계 올림픽에 효자 종목인 양궁이 모범사례로 떠올랐는데요. 대한양궁협회는 지연, 학연 등 파벌로 인한 불합리한 관행이나 불공정한 선수 발탁이 없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국가대표 선발을 할 때도 이전 성적은 배제되고 철저하게 현재의 경쟁을 통해서 선발합니다. 성과에 따른 포상은 물론 메달을 획득하지 못한 선수들에게도 격려금이 지원돼 동기부여만큼은 확실하게 한다고 합니다. 2024 파리올림픽에서 3관왕에 오른 김우진 선수는 "한국 양궁이 세계 최강의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은 협회가 양궁의 '키다리 아저씨'처럼 묵묵히 지원과 애정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진하 기자 jh311@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