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11일 개봉하는 영화 ‘그녀에게’는 저희 가족 얘기입니다. 이상철 감독이 연출하고 배우 김재화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발달장애인 자녀를 둔 가정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는데요. 영화 속 배우 성도현이 연기한 아빠 ‘진명’역 실존 인물이 바로 저입니다. 20년 차 영화전문기자로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영화 리뷰를 써왔지만 이 영화만큼은 조금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 보려 합니다. ‘기자’가 아닌 ‘아빠’ 입장에서, 영화 속 등장인물의 실제 모델 입장에서 말입니다.
영화 '그녀에게' 스틸. (사진=영화로운형제)
최적의 캐스팅
이 영화는 제 아내가 쓴 책 ‘사양합니다, 동네 바보형이라는 말’이 원작이기에 영화적 시선과 흐름은 엄마를 중심으로 흘러갑니다. 발달장애아의 엄마인 ‘상연’은 김재화가 맡았습니다. 처음 캐스팅 소식을 들었을 땐 솔직히 약간은 우려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기존 작품에서 텐션이 높은 코미디 연기에 특화됐던 김재화의 캐릭터가 강해 ‘그녀에게’ 속 ‘상연’을 연기하는 데 있어 몰입감을 방해하진 않을까 우려했던 겁니다. 그런데 이런 제 우려,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 역시 배우는 배우더라고요. 실제 제 아내를 모델로 한 ‘상연’을 연기했지만 어느 순간 저 조차 김재화의 연기에 몰입해 집중할 정도였습니다.
당차고 자신감 있는 기자 시절 모습부터 자녀가 장애 진단을 받은 후 지치고 망가진 모습, 마음을 다잡고 일상을 꾸려가는 모습에서 자녀의 장애를 수용하고 난 이후의 모습까지. 김재화는 섬세하고 밀도 높은 감정 연기를 통해 기존 작품에선 볼 수 없었던 연기력을 선보입니다. 이 영화에 출연 조율을 할 당시 김재화는 개인적으로 ‘번아웃’을 느낄 정도로 배우로서 정서적 고갈을 겪고 있었다는 데, 극 중 ‘상연’을 통해 많은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는 마음을 전해 오기도 했습니다. 제가 다 뭉클하고 감사할 정도였습니다. 아빠 ‘진명’을 연기한 성도현, 낯선 이름일 수 있지만 얼굴을 보면 분명 ‘아!’ 하실 겁니다. 그는 이번 영화를 통해 자신의 이름을 관객들에게 더 단단히 각인할 수 있을 듯 합니다. 발달장애아의 아빠가 짊어진 삶의 무게를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단단하게 잘 잡아냈습니다. 영화에서 드러나지 않은 ‘진명’의 여백을 성도현은 정말 잘 그려내줬습니다. 이건 제가 당사자이니 무조건 보장합니다.
영화 '그녀에게' 스틸. (사진=영화로운형제)
제 아들 역할인 ‘지우’역은 아역 배우 빈주원 군이 맡았습니다. 주원 군은 전체 대본 리딩 날 제 실제 아들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제 아들의 영상을 많이 본 덕분이었을까요. 성인 배우들도 쉽지 않았을 발달장애가 있는 역할을 맡아 훌륭하게 잘 소화했습니다. 실제 영화를 본 관객들이 “정말 발달장애인이 연기한 것이냐”며 많이 궁금해했다고 합니다.
실제 겪은 영화 속 사건들
영화에 나온 사건들, 전부 저와 제 가족이 겪은 실제 사건들입니다. 물론 허구의 상상력이 더해졌지만 ‘있었던 일’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인 거죠. 영화 예고편과 숏츠 영상을 통해 공개된 마트씬이 가장 대표적입니다. 온 가족이 마트에 가서 장을 보는데 아들 ‘지우’가 갑자기 분노 발작을 일으키며 터져 버립니다. 당황한 상연 옆에서 진명이 지우를 둘러업고 사람들 틈을 헤치며 나아갑니다.
영화 '그녀에게' 스틸. (사진=영화로운형제)
사실 이 장면, 제겐 여전히 숨을 멎게 하는 폭탄입니다. 영화 속 지우네 가족이 느낀 당황과 두려움 그리고 공포는 제가 앞으로도 안고 가야 할 숙제입니다. 이 장면의 모티브가 된 실제 상황 당시 아내는 흥분한 아들을 안고 인파 속을 황급히 도망치는 제 모습이 너무도 슬펐답니다. 당시 제게 말하더군요. “자기야, 멈춰진 세상 속에 우리만 있는 거 같더라.” 마트 안에 있던 수 백명이 움직임을 중단하고 시선이 한 곳으로 향할 때 그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이라곤 황급히 도망치듯 나아가는 우리 가족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장면도 있습니다. 진명이 친구들에게 지우를 시설에 보내라는 충고를 듣습니다. 네 맞습니다. 제 지인들이었습니다. 물론 저를 위해, 그리고 제 아내를 위해 나아가 쌍둥이 딸을 위한 조언이었습니다. 하지만 선을 넘은 오지랖이었죠. 애견-애묘 등 반려동물까지 가족이라고 얘기하는 세상에서 자식을 버리란 권유, 그건 폭력입니다.
영화 '그녀에게' 스틸. (사진=영화로운형제)
사람들은 말합니다. 아들이 발달장애인이면 힘들지 않냐고, 말은 통하냐고. 힘듭니다. 말이 안 통해 답답할 때도 많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런 아들로 인해 웃을 일 없는 이 세상에서 웃고 살 일이 더 많다는 겁니다. 아빠인 제 힘듦, 아들의 장애 때문이 아닌 이 세상의 시선이 때리고 할퀸 폭력의 상처였을 뿐이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입니다.
모든 아빠들에게도 위로를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완성된 영화를 보고 나서 약간은 서운하기도 했습니다. 아빠 분량이 예상보다 적어서였죠. “엄마만 부모냐, 아빠도 부모다”란 심정이랄까요. 영화는 엄마의 시선에서 그리고 엄마의 경험과 고통을 통해 한 개인과 가정이 성장해 가는 과정을 그립니다. 극 중에서 아빠의 삶은 덜 비중 있게 다뤄집니다.
물론 영화 초기 기획 단계에서 제가 감독님에게 주문했고 강조했던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영화가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 하면 오히려 어떤 것도 제대로 담을 수 없기에 ‘엄마’에 초점을 맞춰 가자고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내심 기대하는 바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렇게 서운함이 드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영화 '그녀에게' 스틸. (사진=영화로운형제)
왜냐면 저도 힘들었고, 저도 무서웠고, 저도 위로받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영화에선 지우가 병원에서 최종 장애 진단을 받은 날, ‘진명’이 새벽에 몰래 부엌에서 흐느껴 우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저와 같이 발달장애 자녀를 키우는 아빠라면 ‘진명’의 마음을 공감할 수 있을 겁니다. 아들 ‘지우’에게 장애가 있단 걸 알게 된 뒤 아내 ‘상연’과 딸 ‘지수’가 잠에서 깰까 조심스럽게 한 밤 중 홀로 거실에 나와 울음을 삼키던 모습, 아마 모든 아빠들이 가족들에게만은 절대 들키고 싶지 않던 그 모습일 겁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상연’은 아들 장애를 고치기 위해 월급을 훨씬 뛰어넘는 치료비를 카드로 긁어버리죠. ‘진명’은 대출받아 치료를 시키고, 또 대출받아 치료를 시켜야 하는 현실이 답답하지만 그 모든 현실적인 부담을 온전히 혼자 지고 갑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아내가 아들을 실질적으로 양육하는 책임을 지고 있다면 아빠인 전 단돈 10만원이라도 더 벌어오는 책임을 져야 했거든요. 그래야 아들 치료비를 대고, 딸을 교육시키고, 가족이 먹고 살릴 수 있었으니까요.
영화 '그녀에게' 스틸. (사진=영화로운형제)
세상은 ‘아빠’에게 ‘든든한 버팀목’의 모습만을 요구합니다. 물론 가장이란 위치가 그래야 하는 것도 맞겠죠. 하지만 발달장애인 자녀의 아빠로 사는 삶에선 아빠인 저도 두렵고 무섭고 무너질지 모른단 공포가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혼자서 이 악물고 버텨야 했던 시간들이었는데요. 이 영화가 지금 현재 ‘진명’으로 살아가는 모든 아빠들에게 작은 위로가 될 수 있길 바랍니다.
이 세상 모든 그와 그녀들에게 전합니다
영화는 아내가 쓴 에세이 ‘사양합니다. 동네 바보 형이라는 말’이 원작입니다. 기존 발달장애 관련한 영화와 드라마가 허구의 얘기를 토대로 했다면 ‘그녀에게’는 제 가족이 겪은 실화가 바탕이 된 영화입니다. 그래서 등장인물 모습이나 마주하는 사건들이 현실적입니다. 하지만 다큐는 아닙니다. 그만큼 현실 반영이 잘 돼 있단 뜻이죠.
영화 '그녀에게' 스틸. (사진=영화로운형제)
그렇다면 어떤 현실일까요. 영화는 사람들이 발달장애인 가정에 대해 갖는 편견을 깹니다. 발달장애인의 부모는 지치고 어두운 얼굴로 매일 울기만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일까요. 그 가정의 분위기는 어둡고 칙칙하며 삶에 찌들어 고단하기만 할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 가족은 바로 그 발달장애가 있는 아들로 인해 남들보다 더 자주 웃고 가족 간의 끈끈함도 더 높아졌습니다. 아들의 작은 성장에 기뻐하는, 일상에서의 소소한 행복을 매일 느끼는 삶은 아무에게나 주어진 특권은 아닐 겁니다.
전 이런 영화가 많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같은 드라마도 분명 그 나름의 역할이 있었습니다. 우영우 덕분에 사람들은 자폐인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 많이 희석될 수 있었거든요. 하지만 판타지였기에 그랬을까요. 그 효과는 오래가지 못하더라고요.
영화가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라면, 판타지로 그려낸 얘기 안에서도 그 속에 담긴 여러 모습은 최대한 현실에 가까워야 합니다. SF영화가 아니라면 말이죠. 그래야 콘텐츠 속 발달장애인이 아닌 거리에서 마주치는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을 보는 시선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편견이 깨어질 수 있습니다.
‘그녀에게’는 실화이지만 영화입니다. 저희 가족 얘기이면서도 이 세상 모든 ‘지우’ 가족의 얘기입니다. 수많은 지우 가족이 겪었을 현실이자 앞으로 겪어야 할 ‘미래’입니다. 영화 속 등장인물의 실존 인물로서, 장애가 나와는 상관없다 여겼을 모든 그녀들에게 영화를 통해 응원을 보내고자 합니다. 남몰래 숨죽여 울어야만 했을 모든 그들에게는 더 많은 응원을 보냅니다. 힘냅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괜찮을 겁니다.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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