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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기각'→"원고가 졌습니다"…쉽게 쓴 판결문, 왜?
법원 최초, '이지리드(easy read)' 형식의 판결문 구성
2023-01-10 15:06:51 2023-01-10 15:06:51
[뉴스토마토 조승진 기자] "안타깝지만 원고가 졌습니다"
 
법원에서 최초로 '이지리드(easy read)' 형식의 판결문이 나왔습니다. '이지리드'는 단문과 동사 위주의 쉬운 문장과 구어체, 그림 등으로 구성되는 방식을 말합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전문적인 법률용어 대신 실생활 용어로 판결문을 구성한단 얘깁니다. 이번 판결문에는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는 문장 다음, 괄호로 "안타깝지만 원고가 졌습니다"가 덧붙여져 있습니다. 아래에 나온 것처럼 그림도 삽입됐습니다.
 
'이지리드(easy read)’ 판결문 일부. (사진=서울행정법원)
 
서울행정법원 11부(재판장 강우찬)는 지난해 12월2일 법원 최초로 이지리드 형식으로 판결문을 구성했습니다. 해당 사건의 원고인 청각장애인 A씨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A씨는 같은 해 10월22일 탄원서를 통해 "알기 쉬운 용어로 판결문을 써 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고, 재판부는 "장애인의 '당연한 권리'"라며 화답했습니다.
 
쉽게 쓰인 판결문, 가능했던 이유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UN장애인권리협약 제13조는 '장애인이 평등하게 사법에 효과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보장하도록 하는' 규정을 두고 있다"고 했습니다. 또 UN에서 점자, 수화, 이지리드, 오디오 및 비디오 등 의사소통 보강 수단을 개발하라고 권고했다고 덧붙였습니다. A씨의 요청의 당위성과, 해당 판결문의 등장 이유를 세세하게 밝힌 겁니다.
 
이 같은 재판부의 답변은 재판장 개인의 경험과도 관련 있을 수 있겠습니다. 해당 재판부의 강 부장판사는 2022년 8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제2·3차 심의에 한국 사법부 대표로 참석했습니다. 해당 회의는 정기적으로 각국의 장애인 권리협약 이행 상황 등을 점검하는 자립니다.
 
같은 해 9월 유엔 장애인권리위원회는 심의 결과를 통해 국내 장애인의 사법 접근성 부분을 꼽으며 장애인 차별금지법 제26조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차별금지법 제26조는 사법·행정절차 및 서비스 제공에 있어서 장애인 차별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위원회는 "장애인을 위한 사법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정부가 적절한 편의 제공을 하도록 하는 장애인차별금지법이 효과적 실행이 되고 있지 않음을 우려한다, 나아가 사법부 관계자가 장애인 권리에 대해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점을 우려한다"고 했습니다.
 
<법률신문>에 따르면 강 판사는 "본회의에서 사법부와 관련된 협약 제13조(사법접근성) 부분이 지적됐고, 사법부도 유엔 장애인권리협약을 충분히 존중하고 이행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며 "법원에서도 많은 판사가 함께 고민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번 판결문이 나오기 전부터 쉬운 판결문을 제공하기 위한 고민이 있었단 얘깁니다.
 
 
(사진=뉴시스)
 
'이지리드' 판결문, 전면화 가능할까?
 
이번 판결문은 전체 12쪽 중 첫 4쪽만 이지리드로 구성됐습니다. 나머지 8쪽은 기존의 판결문 형식으로 쓰인 겁니다. 판결문 형식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뉴스토마토> 취재 결과 이지리드 판결문을 바라보는 일선 판사의 시각도 엇갈렸습니다. 재경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법률적 쟁점을 명확히 하고, 이에 따른 판결이 이뤄져야 하므로 기존 어법을 바꾸는 것 자체는 이뤄지기 어렵다"라며 "법률 용어가 아닌 일상 어휘를 쓰는 것은 오히려 시민들에게 혼돈을 줄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반면 다른 재경지법의 판사는 이지리드 형식 판결문에 긍정적인 의견을 보였습니다. 해당 판사는 "이지리드 형식 판결문이 늘어나고 정착되면 좋지 않겠냐"라며 "개별 판사의 판단이 아닌 법원 예규로 장애인을 위한 이지리드 형식이 권장된다면 이 같은 판결문도 늘어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조승진 기자 chogiza@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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