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분야를 막론하고 ‘독보적’이란 찬사를 끌어다 쓸 수 있는 대상자가 몇이나 될까 생각해 봅니다. 분명 적을 겁니다. 그것도 아주 적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극소수 가운데에서도 ‘대체 불가’란 단어를 더한다면 얘기는 더욱 더 달라지게 됩니다. ‘대체 불가’란 단어 자체에 이미 ‘그 사람 외에는 대체를 할 수 없다’란 뜻이 담겨 있습니다. ‘대체 불가의 독보적 존재’라 부를 수 있는 이 어마어마한 찬사 그리고 이 같은 타이틀을 가질 수 있는 사람. 여러 분야 가운데 배우로만 한정한다면 극단적으로 극소수의 이름이 거론될 듯하네요. 대략 두 어명 정도. 그 가운데 이 배우의 이름은 반드시 들어가야 마땅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올해로 연기 인생 63년차. ‘국민 엄마’ ‘국민 할머니’란 타이틀도 그에겐 결코 아깝지 않지만 오히려 ‘우스꽝스럽던’ 시트콤 시절 모습을 자신의 최고 배역으로 주저 없이 꼽아 눈길을 끌기도 한 이 배우. 이쯤 되면 다들 누군지 알 듯합니다. 배우 나문희입니다. 그가 연기를 하면 가짜도 진짜가 됩니다. 진짜는 더욱 더 힘을 받아 살아 숨쉬는 ‘온전한 진짜’가 됩니다. 그래서 ‘나문희’란 이름 석자는 대한민국에서 ‘감독’이란 직함을 갖고 있는 직업인이라면 반드시 꼭 한 번은 함께 하고 싶은 배우 리스트 최 상단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나문희는 1941년생으로 올해 여든 둘입니다. 그럼에도 그의 열정과 직업적 에너지는 20대 초반 배우의 그것을 넘어섭니다. 그 에너지를 오롯이 쏟아 부은 ‘영웅’ 속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 그래서 당연하게 ‘영웅’을 본 세대 불문 관객들은 여든을 넘은 이 여배우에게서 진짜를 느끼게 나올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배우 나문희. 사진=CJ ENM
“조 마리아 여사 누군지 몰랐다”
‘영웅’은 윤제균 감독이 데뷔 이후 처음 연출에 도전하는 뮤지컬 영화입니다. 극중 당연하게 노래를 하는 장면이 많이 등장합니다. 대사를 노래로 전달해야 합니다. 국내 상업 영화에선 꽤 생소하고 또 연출자들도 쉽게 손 대지 못하던 장르입니다. 그럼에도 쌍천만 흥행 감독이란 타이틀을 보유한 윤 감독이 연출을 맡으니 어느 정도는 믿음직스럽기는 합니다. 그런 의중은 여든을 넘은 베테랑 중의 베테랑 여배우 나문희에게도 분명 적용 됐을 듯합니다.
“당연히 걱정도 됐죠. 내가 무슨 뮤지컬이라고. 그런데 예전에 윤 감독이 제작을 맡았던 ‘하모니’를 한 번 해 본 경험도 있고. 당시 나에 대한 대접이 많이 좋았던 기억이 있어요(웃음). 대접이 좋다는 말은 뭐냐 하면, ‘ 이 사람이 날 믿는 데가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 거죠. 윤 감독이 날 그렇게 대해줬으니 나도 믿음이 생겼죠. 뭐 내 나이에 맡을 배역이야 많지 않아서 조 마리아 여사에 대한 제의도 놀랍진 않았어요.”
배우 나문희. 사진=CJ ENM
나문희가 맡은 조 마리아 여사는 안중근을 낳은 어머니입니다. 너무 유명하지만 실체는 전해지지 않는 ‘아들에게 보낸 편지’ 주인공으로 유명합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조 마리아 여사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입니다. 안 의사도 ‘토마스’(도마)란 세레명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종교인이자 모자 관계 어디로 시선을 돌려도 납득되지 않는 글. 극중 ‘아들에게 죽으라’는 편지의 내용이었습니다.
“(한숨을 내쉬며 잠시 먼 산을 바라본 뒤) 조 마리아 여사가 자기 아들인 안중근에게 일본 재판부에 삶을 구걸하지 말고 ‘그냥 죽으라’고 하잖아요. 이게 정말 실화라고? 지금도 사실 가슴이 떨려요. 믿을 수도 없고. 엄마에게 아들은 10살이든 50살이든 100살이든 그냥 자식이에요. 엄마라면 자기 목숨을 내주고서라도 구하고 싶은 게 자식인데, 그 자식 보고 그냥 죽으라는 엄마 속은 대체 어떨까 상상해 봤죠. 사실 지금도 이해가 안되고 또 제가 그걸 이해할 그릇도 안되죠.”
배우 나문희. 사진=CJ ENM
“존경한다는 말도 부족한 분들”
실제 역사에도 조 마리아 여사는 크게 다뤄지지 않았고 또 알려진 것도 없습니다. 그저 몇 년 전 한 지상파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안 의사가 사형 집행을 맞기 전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에게 받은 편지 내용이라고 공개되면서 이름 정도가 알려지게 됐을 뿐입니다. 영화에서도 조 마리아 여사 분량은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나문희란 대배우가 이 배역을 이해하고 들어가야 하는 지점, 그리고 해석하고 공감한 지점 몇 가지를 물어봤습니다.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전 사실 안중근 의사도 이해 안되요. 처자식들 전부 놔 두고 나라 구한다고 거길 가서 그렇게 됐잖아요. 결과적으로 정말 대단한 일을 하셨지만 당시 가족들이 겪었을 고초는 어땠을까 싶죠. 그런데 그런 아들에게 ‘일제에 삶을 구걸하지 말고 그냥 죽어라’고 보내는 엄마라니. 정말 대단하잖아요. 그냥 제 생각에는 어머니가 저 정도로 대장부인데, 저런 아들이 나온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싶어요. 그 분들에겐 존경한다는 말조차 너무 부족해 보여요.”
배우 나문희. 사진=CJ ENM
윤제균 감독은 앞서 뉴스토마토와의 인터뷰에서 ‘대배우 나문희조차 같은 장면을 열 몇 번 촬영했다’고 공개한 바 있습니다. 나문희의 연기력 문제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뮤지컬 장르 특성상 미묘한 차이를 위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반복 또 반복한 것입니다. 이 장면에 대해 나문희는 ‘결코 내 의도가 아니었다. 윤 감독의 고집이었다’고 전하며 웃으셨습니다. 그는 노래의 기교 보다는 감정을 실어 부르는 것으로 조 마리아 여사의 속내를 전달하는 데 주력하려 노력했다고 하네요.
“아마 영화 거의 마지막 장면에 편지를 보내고 조 마리아 여사가 혼자 방에서 눈물 흘리며 부르는 노래를 말하는 것 같은데, 전 절대 여러 번 찍자고 안했는데 윤 감독이 욕심을 냈어요(웃음). 열 몇 번을 한 것 같은데, 이 나이에 쉬웠겠어요 하하하. 나중에는 좀 편집이 됐다고 해서 아쉬웠죠. 그 장면 찍고 윤 감독이 너무 싫어지더라고요(웃음). 사실 미운정 고운정이 들어서 다음 작품 또 하자고 하면 할 거 같긴 해요. 하하하.”
배우 나문희. 사진=CJ ENM
“내 인생 최고 배역…”
무려 63년 연기 인생입니다. 그의 연기를 통해 탄생된 여러 배역들은 지금도 여러 후배들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전 국민의 눈물을 쏟게 만든 명 연기 명 캐릭터들이 나문희의 연기로 탄생됐습니다. ‘국민 엄마’란 타이틀도 여러 선후배들이 나눠 갖고 있지만 가장 어울리는 ‘국민 엄마’를 꼽자면 나문희가 사실상 0순위입니다. 그런 나문희에게 배우 인생 최고 캐릭터와 작품을 꼽아 달라고 했습니다. 수백 작품이 넘는 필모그래피입니다. 정말 어려울 듯합니다. 그런데 상상을 한 것과는 전혀 달리 찰나의 고민도 하지 않습니다. 나문희가 주저 없이 꼽은 작품과 배역은 정말 의외였습니다.
“전 ‘거침없이 하이킥’이 너무 좋아요. 지금도 절 보면 아주 어린 아이들도 ‘호박고구마’라고 소리 쳐요. 진짜 너무 기분이 좋아요. 점점 사는 게 힘들고 다들 얼굴 찡그리는 일만 많은데 그런 웃고 즐길만한 작품이 너무 없는 거 같아요. 난 개인적으로 다리에 힘이 빠지고 대사가 제대로 외워질 때가 와도 ‘하이킥’ 같은 코미디는 누구보다 잘할 자신이 있어요. 지금도 생각만 해도 즐거워요. ‘호박고구마’ 할머니를 넘어서는 작품이 꼭 다시 한 번 왔으면 좋겠어요(웃음).”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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