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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익도의 밴드유랑)김종서 "시나위는 음악적 고향"
올해 데뷔 36주년…김종서 뎁스 인터뷰
부활-시나위 초대 보컬 "록 불모지에 타오른 불꽃"
서태지-신대철과 찍은 시나위 4집 커버는 난지도 암벽
연말 사진전…내년 비틀즈 오마주 팝 발라드 곡
2022-11-25 17:32:59 2022-11-25 17:32:59
[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하늘까지 솟아오르는, 귀기 어린 목소리는 한국 대중음악의 명징한 기록이다.
 
무속처럼 신명의 세계를 열어젖히는 무아지경이자, 헤비메탈 전성기를 화려하게 태운 마지막 불꽃.
 
그래서, 굵은 기타톤과 거친 노이즈를 뚫고, 초음속 여객기처럼 질주했던 이 음역대를 단순히 노래로만 한정할 수가 없다. 
 
머틀리 크루의 빈스 닐, 레드 제플린의 로버트 플랜트, 그러나 그들과는 또 달랐던 동양적 창법과 음색, 예스, 이것은 한국 대중음악사로 들어가는 명백한 통로다.
 
한국 1세대 헤비 메탈 뮤지션이자, 부활과 시나위의 초대 보컬인 김종서(57)를 만났다. 지난 21일 그가 운영하는 서울 압구정로데오의 한 LP 바에서다. 지하의 낮은 실내 조도에도 까만색 뿔테안경과 스카프, 밝은 미소가 한 눈에 들어왔다. 뒤로는 1만5000장 규모의 LP와 라이브 무대도 가능한 PA 장비가 '명예의 전당'처럼 진열돼 있었다.
 
최근 사진전을 연계한 콘서트 준비로 분주한 그와 조금 더 깊고 눅진한 음악 이야기를 해보기로 했다. 부활과 시나위를 거쳐 솔로, 그리고 올해 데뷔 36주년에 이르기까지, 1시간여 인터뷰는 '음악적 웜홀'로 빨려드는 체험이었다.
 
최대한 그대로 전해본다. 1980~1990년대, 한국적 헤비메탈이 불을 지르던(시나위 4집 수록곡 'Set my fire') 그 때로, 신대철-서태지와 장발을 치렁이며 폐허 같은 난지도(시나위 4집 표지 장소) 바위에서 저항과 절규를 내쏟던 그 시기로, 시계 태엽을 되감아보는 것이다.
 
최근 바이닐(LP) 붐이 불면서 재발매된 시나위 4집 LP. 왼쪽부터 김종서, 신대철, 서태지, 고 오경환이 함께 찍은 사진의 배경 장소는 지금의 하늘공원이 있는 서울 마포구 난지도다. 사진=벅스뮤직
 
-지난해부터 압구정 LP바('볼륨')를 운영해오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LP 감상 뿐 아니라 한국 대중음악의 라이브를 다양하게 들을 수 있는 창구가 되면 좋겠습니다.
 
비틀즈부터 팝의 계보를 꿰고 있는 음악가로서, 이런 공간은 어릴 적부터 늘 동경했습니다. 동시에 국내 대중음악 시장도 조금 더 다양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록, 재즈 같은 다양한 색깔의 뮤지션들이 설 무대를 서서히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내년에는 하드록이나 메탈까지도 관객들의 선택 폭을 넓혀가면 하는 바람이 있고요. 처음부터 이 공간으로 부를 창출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저 한국 음악과 공연 문화가 편중되지 않고, 골고루 소비됐으면 하는 바람에서 시작했습니다.
 
-LP 감상용 스피커와 라이브 무대의 음향 장비가 특이해 보이는 걸 보니, 애정 가득한 공간임이 느껴집니다.
 
LP 감상용 턴테이블과 진공관엠프, 스피커가 따로 있고요. 공연할 때는 따로 PA(스피커 증폭 시스템) 장비를 써서 소리가 빵빵하게 나오도록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음악가인데, 음향 쪽은 신경을 써야지요. (웃음) 매일 라이브 음악가들을 섭외하고 무대에 세워오고 있어요. 코로나 여파로 힘든 부분이 있었지만, 점점 입소문이 나고 있어 다행입니다. 
 
-LP는 어떻게 보면 김종서 음악의 시작, 뿌리와도 닿아 있는 매체가 아닐까 싶은데요. LP라는 매체가 주는 기억이란 건 무엇일까요.
 
그렇죠. 제 목소리가 최초로 담긴 게 시나위 2집 'Down And Up(1987)' LP에요. 턴테이블 바늘을 올렸을 때, 제 목소리가 나오던 그 경험, 그 순간을 지금도 잊지 못해요. 학창 시절의 저는 내성적이었던 학생이라, 자연스럽게 삶의 돌파구가 음악이었거든요. 돈도 없고 가난해서 청계천을 어슬렁 다니며 '백판'을 샀어요. 조악한 흑백 커버에 음질도 좋지 않았지만, 당시 빵 살 돈을 아껴가며 500원에 한 판씩 사 모았어요. 비틀즈 모든 앨범을 달달 외울 정도로 들었고, 아바, 크림, 야드버즈, 퀸, 딥퍼플... 자연스레 '팝 매니아'로, 록 밴드에서 노래하고 싶다는 꿈으로 이어진거죠. 배고픔에도 LP가 준 것은 '많은 것을 누리고 있다는 행복감'이었어요.
 
사진전·콘서트를 엮어 ‘B-Cut’이라는 공연을 준비 중인 김종서. 사진=FX솔루션, 더메르센
 
-얘기가 나온 김에, 부활의 전신인 디엔드(1984~1985년 무렵 활동)와 시나위 시절(1집 이전 잠깐 활동, 그리고 1987년 이후 2집과 4집 참여 등 본격 활동)의 이야기로 넘어가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부활과 시나위는 어떤 의미로 기억되고 있습니까. 또 한국대중음악사에는 어떤 의미가 있었다고 보십니까.
 
80년대 중반을 돌아보면, 국내에도 급격한 꿈틀거림이 있었어요. 외국 메탈을 즐겨 듣던 록키드들을 중심으로요. 70년대 대학가요제로부터 풋풋함을 무기로 내세우던 선배들, 흔히 그룹사운드라 말하는 그들보다 '우리는 조금 더 뿌리에 가보자, 영미권보다 더 짙은 색깔의 음악을 해보자' 했어요. 그 무브먼트의 중심에는 강북의 부활과 강남의 시나위가 있었고, 그 두 팀의 초창기 제가 함께 했다는 것은 돌아봐도 굉장히 운이 좋았죠. '록 불모지에 한 가닥 불을 피우자, 기성세대와 우린 또 다르다, 더 힙한 리얼의 근간 사운드에 다가설 것'이란 사명감이 대단했던 기억이 납니다.
 
-시나위 2집 시절, 사운드 연구와 녹음에 대해서도 조금 더 들어보고 싶은데요.
 
박남정, 소방차 붐이 일던 시기, 부활은 조금 더 대중적인 접근이 있었던 반면, 시나위는 원초적인 하드록, 그들만이 낼 수 있는 정공법을 택했던 팀이었어요. 레코딩 엔지니어와 싸우듯 만든 시나위 2집은 지금 다시 들어봐도 소리의 완성도가 높아요. 당시 미국에서도 메탈음악이 활기를 띄고 있었고, 그때 외국매체에서도 저희를 크게 다뤘던 기억이 있습니다. 여러모로 기념비적 앨범이지 않나 싶습니다. 특히 신대철 씨의 연주는 시나위의 뼈대였습니다. 그렇게 블루스 기반의 심지 깊은 소리를 내는 분이 없었어요. 단단하고 기본이 내재된 소리, 그건 아마 아버지 신중현 선생님의 영향이었을 거예요. 어렸을 때부터 장난감처럼 기타를 가지고 놀았다니, 어련했겠어요. 강기영(베이스), 김민기(드럼). 그분들의 연주도 지금 들어보면 '어떻게 그 나이에 그런 연주를 했어' 할 정도라고 생각해요. 녹음의 경우, 투 트랙까지는 아니어도 24트랙 48트랙 채널 녹음을 했던 시절이니까 간접적으로 아날로그를 겪은 세대기도 하고요.
 
-'시나위'란 무속음악에 뿌리를 둔 국악 기악합주의 일종이죠. 수직적으로 화음을 쌓기보다, 악기들 간 자율적인 수평적 결합을 우선하는. 시나위라는 밴드 역시 그러한 수평적 결합의 연주 위에, 김종서의 독특한 발성 또한 큰 몫을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레드 제플린의 로버트 플랜트, 머틀리 크루의 빈스 닐을 연상시키면서도 독특했던 한국적 성음. 당대 한국 대중음악에서 이런 보컬이 흔치는 않았다고 생각이 되는데, 당시 시대적 분위기는 실제 어떠했는지요.
 
당시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적인 LA메탈 붐이었어요. 모든 악기들이 현란한 테크닉을 앞세웠죠. 하이스킬의 기타에 맞는 하이톤을 시나위도 접목시켜가야 했습니다. 당시 물론 제가 부족한 점도 많았지만, 그간 없었던 소리였기 때문에 특이했다고 느낀 영향도 분명 있었을 것 같아요. 그 시절에는 이런 불만도 있었던 것 같아요. '왜 딥퍼플 같은 사이키델릭의 사운드를 연구하던 사람이 솔로 음반을 낼 때는 트로트를 할까, 가요 느낌은 꼭 저런 것이어야만 하나.' "우리는 저러지 말자" 했어요. 시나위로서 우리는 타협이란 게 없었어요. 모두가 자기의 연주 스타일을 냈고, 그대로 무대에 올렸어요. 음표들은 헤비메탈 폼(Form) 안에 정확히 들어갔어요. 눈총 받으면서 장발로 거리를 거닐기도 했고요. (웃음)
 
부활-시나위 초대 보컬이자 올해 데뷔 36주년을 맞은 김종서. 사진=FX솔루션, 더메르센
 
-'Farewell to Love', 'Set My Fire', '겨울비' 원곡(김종서 솔로 2집에도 수록)이 수록된 시나위 4집의 완성도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안할 수 없습니다. 이 앨범 작업 당시, 서태지도 처음 만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당시 베이시스트로서의 서태지는 어땠나요.
 
제게 4집 전까지 시나위는 미완의 느낌이었거든요. 마음 속 응어리가 있었고 '한 번 확 불사르고 싶은 욕구'가 있었어요. 처음에 새로 멤버 구성을 했다길래 합주실에 갔는데, '베이스 치는 친구'(서태지)가 어린 나이에 '딱딱' 박자를 맞추더라고요. 리듬이 아주 정확하고, 소리를 깔끔하게 몰아가는 능력이 있었어요. 4집에 보면, 굉장한 하모니들이 많이 들어가는데, 태지가 아이디어를 많이 냈어요. 'Farewell to Love', 'Metalizer' 같은 헤비한 곡이요. 태지는 당시 메탈리카 같은 헤비한 사운드를 많이 좋아했어요. 공격적이고 조금 더 매니악한 아이디어를 내면서, 당시 조금 정체돼 있던 시나위에 산소호흡기 같은 역할을 해준 셈이죠.
 
본보 기자는 최근 재발매된 시나위 4집 'Four(1990)' 오렌지컬러 LP를 이날 가져갔다. 김종서가 되물었다. "우와, 이게 지금 이렇게 나오나요? 나도 사야겠네." 
 
-황폐한 암벽에서 찍은 4집의 앨범 커버도 특이하고, 오늘날까지 많이 회자됩니다. 촬영 장소가 어디였나요.
 
난지도에요. (웃음) 그때 '이거 하는 사람들(메탈음악)'은 일반인이 들어가기 힘들 정도의 지역들을 찾아다니곤 했어요. 폐공장 이런 데...  4집 만들 때는 백두산도 부활도 식고, 록신이 많이 죽어 있을 때였어요. 공연도 없어지고 우리도 설 자리가 점점 없어지니까 자연스레 와해됐죠. 정말 마지막 불꽃을 태워보자 해서 주먹 불끈 쥐고 만든 앨범이에요. 지금봐도 다들 결기 어린 표정이 서려 있네요. 하하.
 
-말씀을 들어보니 시나위는 여전히 '음악적 고향'인가 봅니다. 당시 시나위의 구체적인 음악 제작 프로세스는 어떠했나요.
 
'음악적 고향'... 당연하죠. 신대철 씨의 시나위 아래 블루스 지향의 음악들을 비교적 많이 했어요. 어느 밴드건 보컬리스트가 기타리스트와의 합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시나위 음악도 대철씨가 기타를 들면 시작됐던 거예요. 기본적으로 12소절, 그러니까 '트웰브 박'으로 즉흥 연주를 처음엔 쏟아내곤 했어요. 그리곤 레드제플린이나 에릭클랩튼, 크림이 떠오르는 곡 리프를 그려내죠. 그러면 그 블루스 기반의 기타 워킹에 제가 멜로디를 얹는 거예요. 제 내면 세계 그대로가 분출되는 것이죠. 아까도 말했듯 4집 때는 태지가 굉장히 헤비하고 정확한 리듬을 찍어줬고요. 이 조합이라면 뭔가 꿈꿀 수 있겠다 싶었어요. 지금 들어봐도 시나위 2, 4집은 작위적인 음악이 아니라, 진짜 자유로운 영감의 화학작용으로 만들어진 거라 생각해요.
 
부활-시나위 초대보컬이자 올해 데뷔 36주년을 맞은 가수 김종서. 사진=FX솔루션, 더메르센
 
-송골매도 40년 만에 투어 중이고, 산울림도 최근 릴 기반의 리마스터 LP를 냈습니다. '가왕' 조용필도 최근 신곡을 냈고요. LP가 뜨면서 옛 록도 회귀하고 있는데, 시나위가 다시 결성될 일은 없나요.
 
안 그래도 주변에서 자꾸 시나위 다시 안하냐고 물어보는데, 계획 없습니다. 20대의 저런 날카로움을 지금 와서 어떻게 다시 재현하겠어요. 그래도 발성에 대한 것을 놓지 않고 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노래가 잘 나온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에요. 성악에서 발성법을 찾으면서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이고, 새롭게 갈구하게 되는구나' 깨닫고 있습니다. 성악이 제게 가르쳐준 것은 호흡이었어요. 더 망가지기 전에 깨달아서 다행이에요. 어떻게 보면 목소리는 수천만원짜리를 능가하는 악기인데 말이에요. 과학적으로 체계적으로 접근할 필요성을 깨닫고 있어요.
 
김종서는 목 관리를 위해 술, 담배를 하지 않는다. 자전거를 타며 유산소 운동도 주기적으로 한다. 그가 말했다. "믹 재거(롤링스톤스)가 왜 믹 재거일까요. 어떻게 지금까지도 전 세계를 돌며 투어를 뛰나요. 하루 몇십키로씩 뛰며 운동선수만큼 운동을 한다고 해요."
 
-'대답없는 너', '지금은 알 수 없어', '겨울비' 같은 대표곡들로 솔로로도 의미있는 활동을 해오셨습니다. 사실상 이후 등장하는 김경호, 박완규 등에 앞선 '한국형 록 발라드의 효시'였고, 이것이 후대에도 영향을 미쳐왔는데요. 얘기를 나눠보니, 근데 어쩌면 시나위 때부터의 블루스 스타일이 결국 회색빛의 비눈 같은 정서의 '겨울비'까지 이어진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당시 헤비메탈 보컬로서의 저는 당시 가요계 주류 느낌과는 달랐어요. 감미로운 목소리의 이승철씨는 가요계에 안착해 슈퍼스타의 길을 걸었지만, 저는 당시 제작자들이 원하는 가요 앨범을 내려던 게 아니었거든요. 솔직하게 말하면 제 개인의 작곡집에 가깝죠. 시나위 때 써놓고 발표 못한 곡들을 추려 제 솔로 음반에 담은 것이었어요. 레인보우가 '레인보우 아이즈(Rainbow Eyes)'를, 딥 퍼플이 '솔져 오브 포츈(Soldier of Fortune)' 같은 발라드 곡을 이후 발표했듯. 제 음악 뿌리는 역시 시나위 때부터 이어온 블루스가 맞아요. 아주 유니크한 팝 발라드를 해도, 그걸 바꿀 순 없어요. 
 
-'서태지와 아이들'의 '환상 속의 그대'(피처링), '프리스타일'(서태지와 공동 작곡과 가창) 등에도 참여하셨습니다. 90년대 다장르를 넘나든 활동은, 김종서의 성음이 비단 헤비메탈이나, 록 장르로만 가둬둘 수 없음에 대한 증명이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태지가 처음에 댄스음악 하겠다는 얘길해서 제가 되게 뭐라고 했어요. '록커가 왜 그런 음악을 해!' 근데 데모를 딱 들려주는데,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좋은 건 좋은 거예요. 제가 갖고 있는 틀에 갇혀서 좋은 걸 좋다고 말 못하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예요. 태지의 그런 모습이 제게도 생각을 전환시킨 계기가 됐어요. 제가 좋아하는 그룹 중 하나는 비스티보이즈에요. 미국의 힙합을 록 음악에 성공적으로 녹인 밴드인데, 결국 흑인 힙합에까지 되레 영향을 줬잖아요. '틀에 갇히면 손해보는 것이 많구나' 생각해요. 이상한 틀을 갖춰놓고 작위적으로 음악하는 사람들을 싫어해요.
 
-12월 9~10일 사진전과 라이브 콘서트를 접목하는 콘서트를 엽니다. 지난 20여년 간 찍어온 사진을 전시한다는 점이 이색적인데, 어떤 사진들이 담기는지, 또 포토그래퍼로서의 김종서와 음악가로서의 김종서는 어떻게 같고 다른가요.
 
'롤라이 플렉스'라는 50년대 카메라를 꽤 오래 전부터 들고 찍었어요. '안 찍었으면 몰랐을 시선들'이 그 안에 있었고, 재미가 있더군요. 필름 현상도 제가 직접할 정도로 애정이 있어요. 이번 사진전은 주로 도시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명암이 존재하는 대도시, 그치만 그걸 아름답게 하는 존재는 결국 인간임을... 전문 사진작가들만큼 고급 진 기법은 아닐 수 있지만, '음악 하는 김종서의 시선은 이런 것'이라고 봐주시면 좋겠어요. 음악과는 또 다른 제 내면의 표현이 될 겁니다.
 
1시간 가량의 인터뷰가 '불타는 엔진 소리'('Metalizer' 가사)처럼 지나갔다. 마지막 질문이 나오자, 김종서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답변 뒤에도 오렌지빛 LP판 커버를 들여다봤다.
 
-시간을 돌려 1980, 90년대로 돌아간대도 음악가의 업을 택하겠습니까.
 
그럼요! 음악은 제가 제일 잘하는 거고 제일 행복한 거예요. 내가 연주를 하든 노래를 하든, 음악을 듣든, 지금도 무대 설 때 제일 행복합니다. 저 또한 삶의 등락이 있었지만, 음악을 하기 싫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어요. 정신적으로 힘들어도, 재생 버튼 '딱' 누르고 비틀즈 노래가 흘러 나오면 지금도 너무 좋아요. 내년 초, 팝 발라드를 낼 거예요. 평생 '비틀즈, 비틀즈'한 내가 비틀즈를 오마주할 겁니다. 악기는 기타, 베이스, 드럼, 오르간 딱 최소 편성으로, 가사도 신파적으로!
 
올해 데뷔 36주년을 맞은 김종서. 사진=FX솔루션, 더메르센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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