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창작’이란 개념 안에서 뻔한 건 여전히 ‘좋지 못한 것’에 수렴한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고 새로움에서 새로운 감정을 끌어 내야 하는 작업이 ‘창작’이라면 ‘뻔한 것’은 결코 ‘좋은 것’이 될 수 없다. 하지만 기억을 넘어 추억을 그려내는 것이라면 이 기준점과 풀이는 당연히 그리고 무조건 달라져야 한다. 우리 모두가 한 번쯤 반드시 겪어 본 감정. 세월의 흐름이 ‘다름’을 전한다고 하지만 감정의 결은 세월의 흐름에 결코 달라질 수 없는 기본 ‘상수’(constant)다. 누군가를 좋아했고 그래서 누군가로 인해 설렘을 느껴본 적이 있다면 그건 ‘뻔한 것’이지만 그 순간부터 결코 ‘뻔한 것’이 아니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변하지 않는 완전 무결한 나만의 감정, 즉 오롯한 감정의 ‘변수’(variable)가 된다. 넷플릭스 영화 ‘20세기 소녀’는 뻔한 감정의 흐름을 그려 나간다. 하지만 10년 그리고 20년 뒤 어릴 적 일기장을 들춰 보는 그때의 감성이 담겼다. 아련하고 그래서 입가에 머금게 되는 알 듯 모를듯한 행복한 미소 같은.

시간적 배경은 1999년. 17세 소녀 보라(김유정)는 둘도 없는 단짝 연두(노윤서)가 심장 수술을 위해 미국으로 떠난단 사실에 걱정도 되고 아쉽기도 하고 축하도 하면서 건강을 빈다. 연두는 미국으로 떠나기 전 단짝 보라에게 부탁한다. 태어나 처음 느껴 본 감정, 첫 사랑에 대한 고백. 우연히 눈에 들어온 남학생. 이름은 ‘백현진’. 연두는 이름만 아는 백현진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한다. 미국으로 떠난 연두를 대신해 보라는 백현진 뒷조사를 시작한다. 키는 몇 센티미터인지, 발 사이즈는 몇 밀리미터 인지. 좋아하는 노래는 어떤 곡인지. 좋아하는 가수는 누구인지. 좋아하는 색깔은 무엇인지. 하나부터 열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조사 한다. 근데 문제가 있다. 약간의 걸림돌이다. 백현진 주변을 맴돌며 그의 모든 것, 일거수일투족을 조사하는 보라 주변에 항상 한 남자가 있다. 바로 백현진의 단짝 풍운호. 백현진보다 키도 더 크고 얼굴도 더 잘생겼다. 그런데 풍운호, 좀 거슬린다. 하지만 보라는 연두를 위해 백현진에게만 집중한다.
'20세기 소녀' 스틸. 사진=넷플릭스
보라와 운호의 관계는 예상 밖으로 더 질긴 인연처럼 이어진다. 연두의 첫사랑이자 짝사랑 백현진과 풍운호가 함께 방송반에 지원한다. 당연히 보라도 방송반 지원을 한다. 문제는 백현진은 방송반에서 탈락하고 풍운호와 보라가 덜컥 붙어 버렸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보라는 풍운호를 이용할 수 밖에 없다. 운호는 대놓고 현진에게 관심을 보이는 보라가 묘하다. 운호는 보라가 현진을 좋아한다 여긴다. 자신에게 숨김 없이 현진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기만 하면서, 정작 자신에 대해선 어떤 것 하나 물어보지 않는 보라다. 그런 보라가 서운한 운호. 그리고 서운한 감정은 야속해져간다. 그리고 점차 궁금해져 간다. 도대체 보라는 어떤 아이 일까. 그런 궁금증은 결국 보라를 향한 마음으로 발전한다. 하지만 보라의 관심은 온통 현진 뿐. 그리고 현진 또한 보라가 자신을 좋아하는 줄 알게 된다.
'20세기 소녀' 스틸. 사진=넷플릭스
더 큰일은 미국으로 심장 수술을 하러 떠난 연두가 돌아온 뒤다. 보라는 순전히 단짝 연두의 마음을 위해 현진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었다. 그런 보라의 행동에 뜻밖에 궁금증이 생기고 예상치 못한 관심을 갖게 된 현진의 단짝 운호다. 현진 역시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보라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처음부터 현진을 짝사랑했던 연두가 돌아왔다. 이제 이들 10대 남녀 두 사람에겐 우정이 먼저가 될까. 사랑이 먼저가 될까. 얽히고설킨 관계의 끝은 어떻게 될까.
'20세기 소녀' 스틸. 사진=넷플릭스
‘20세기 소녀’는 그 자체로 소복하게 먼지가 쌓인, 지금은 사라진 만화방 한 켠을 장식했던 순정만화다. 멋들어진 남자 그리고 서로가 친구인 현진과 운호, 그 반대편에는 모든 것에 적극적이고 쾌활하고 활발한 성격의 말괄량이 보라. 그리고 보라 곁에는 예쁘고 순진하면서도 예상치 못하게 어딘가 아프고 또 그래서 마음이 쓰이는 연두. 아주 적절한 구성이다. 이런 구성, 우린 너무 많이 봐 왔고 너무 흔해서 익숙하다.
'20세기 소녀' 스틸. 사진=넷플릭스
익숙하기에 대충 그리고 대략적으로 이들 관계의 기승전결은 충분히 예상된다. 이걸 클리셰라 한다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걸 기억 속 추억으로 바라본다면 기분 좋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게 하는 선물 같은 사진 속 모습들이다. 아프고 힘들었지만 그래서 성장했다. 당시에는 뭐가 그렇게 아프고 힘들고 괴로웠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나고 난 뒤 기억이 추억으로 변화될 즈음이면 알게 모르게 그 시절을 떠올리며 행복했던 미소를 짓게 될 것 같다. ‘20세기 소녀’ 속 등장하는 비디오 대여점, VHS테이프, 무선호출기 삐삐, 공중 전화기, 전화 앙케이트 설문 조사 등등. 모두가 기억이면서 추억으로 자리한 ‘행복한 미소’ 들이다.
'20세기 소녀' 스틸. 사진=넷플릭스
그래서 ‘20세기 소녀’ 속 인물들 모두가 순정 만화 속 주인공들처럼 멋지고 착하고 순진하고 구김살 없이 반듯하다. 20대가 겪는 풋내 나는 사랑의 감정도, 30대가 겪는 격한 감정의 소모를 담보로 하는 사랑의 나눔도, 40대 이후 삶의 관조를 기본으로 하는 사랑의 익숙함도. ‘20세기 소녀’에겐 너무 어려운 질문이다. 이건 그냥 그대로 서툴지만 그래서 아름답고 결과적으로 그래서 깨끗했던 그 시절 우리 모두의 마음 같은 한 켠의 빈 공간처럼 느껴진다.
'20세기 소녀' 스틸. 사진=넷플릭스
주인공 ‘보라’를 연기한 김유정, 그의 절친 ‘연두’를 연기한 노윤서. 두 사람의 우정과 사랑 사이의 줄다리기가 이제는 보기 좋고 또 그립고 반가우면서 아련한 느낌이다. ‘풍운호’를 연기한 변우석은 그 자체로 순정 만화 속 주인공이다. 그의 친구 ‘백현진’을 연기한 박정우의 힘찬 모습도 충분히 긍정적이기에 더 없이 눈길을 사로 잡는다. 무엇보다 ‘성인 보라’를 연기한 한효주의 성숙함이 이제는 편안함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 시절 떨리는 가슴을 부여 잡고 얼굴을 붉히며 눈길을 주던 영화 ‘정사’가 이제는 ‘그렇고 그런 영화’가 아니란 나이가 된 우리다. 그 나이 보라를 연기한 한효주의 얼굴, 그 자체가 ‘20세기 소녀’의 기억이고 추억은 아닐까 싶다.
'20세기 소녀' 스틸. 사진=넷플릭스
아름다운 기억과 추억의 중간 어디에 자리한 우리 모두의 아련함. 그게 바로 ‘20세기 소녀’다. 10월 21일 넷플릭스 공개.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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