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그는 ‘지쳤었다’고 했다. 해석하기에 따라서 여러 의미가 될 수 있었다. 우선 육체적으로 ‘지쳤다’는 말도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직업상 ‘지쳤다’는 말도 될 수 있었다. 직업상 ‘지쳤다’는 말은 다시 몇 가지로 나눠질 수 있다. 이 일 자체에 지쳐 버렸다는 말, 그리고 이 일을 함에 있어서 소비하는 광범위한 감정의 노동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지쳤었다’의 문장 전후 맥락을 이어 살펴보면 당연히 가장 마지막의 해석이 타당할 듯하다. 그는 자신에게 요구하고 또 요구되는 이미지가 너무도 획일화 돼 있는 지점에 대해 이제는 ‘지쳐갔었다’고 말한 것이다. 그럴 시기였다. 딱 그 감정이 그릇의 끝까지 넘실거리며 차 올라 넘칠 듯할 때였다. 생각지도 못한 시나리오 하나가 그의 손에 전달됐다. 당연히 또 자신에게 요구되고 요구하는 뻔한 이미지의 배역이라고 생각했단다. 그런데 아니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느낌이 강하게 전달돼 왔다. 무엇보다 이걸 풀어가는 방식이 너무 색달랐다. 이런 시나리오가 자신에게도 왔다는 게 뭔가 희열을 돌게 하는 듯했다. 다시 생기가 돌았다. ‘지쳤다’는 말은 그의 입에서 씻은 듯이 사라졌다. 감독을 만나고 관계자를 만났다. 그렇게 배우 소지섭이 영화 ‘자백’과 만나게 된 것이다.
배우 소지섭. 사진=피프티원케이
‘자백’ 개봉 직전 만난 소지섭은 너무도 궁금하다고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소지섭’이란 이름 석자는 이미 정형화된 캐릭터 그리고 이미지를 담고 있다. 이건 누가 뭐라 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데뷔 27년 차 배우이면서 의외로 자신의 스크린 대표작을 선뜻 내밀지 못하는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의 등장과 그의 존재감은 분명 눈을 즐겁게 하지만 머리를 즐겁게 하는 지점은 이젠 많이 지났다고 여기는 듯했다. 그래서 자신의 이미지에 고민할 때쯤 ‘자백’을 만났다.
“제가 올해로 데뷔 27년 됐어요. 관객들이 나한테 더 궁금한 게 있을까. 요즘 따라 그런 생각이 정말 많이 들었어요. 내게 새로운 게 있나 싶을 정도였죠. 그렇게 점점 지쳐 갔는데, 그때 ‘자백’ 시나리오가 왔어요. 진짜 너무 재미가 있더라고요. 제가 해보지 않은 스타일이었어요. 근데 이게 왜 나한테 왔지 싶었죠. 물론 그 이유는 감독님이 ‘왜 소지섭이 이 영화에 필요한지’를 담은 편지를 주셔서 제 마음이 완전히 움직였죠(웃음)”
연출을 맡은 윤종석 감독이 소지섭을 캐스팅하고 싶어서 그에게 전한 편지 속 말 한마디는 사실 ‘자백’의 스포일러나 마찬가지라 공개하긴 힘들다. 하지만 소지섭을 선택한 것 자체가 윤 감독의 과감한 결단이었 단 점에서 의외였다. 그런 선택은 물론 이 영화의 원작이 품은 강한 반전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원작은 국내에도 개봉한 바 있는 스페인 영화 ‘인비저블 게스트’다. 영화 마니아들에겐 상당히 낯익은 작품이기도 하다.
배우 소지섭. 사진=피프티원케이
“시나리오를 다 읽기 전에도 원작이 있는 작품인지 몰랐어요. 결과적으로 시나리오를 다 읽고 원작을 보긴 봤죠. 정말 마지막 반전이 너무 끝내 주더라고요(웃음). 원작과 비교를 해보면 ‘자백’은 큰 틀이 비슷하고 또 시작 부분도 비슷해요. 마지막 반전도 좀 비슷하지만 그 외에 나머지는 많이 다르더라고요. 원작이 반전을 위한 영화라면 ‘자백’은 반전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의 영화 같았어요. 그 안에서 제가 기존 이미지와 많이 다르게 나와 너무 짜릿했죠(웃음)”
소지섭이 ‘자백’에서 맡게 되는 인물은 ‘유민호’다. 재벌가 출신 아내와 결혼한 얼굴 잘생긴 전도 유망한 IT기업 대표다. 아름다운 아내와 함께 살면서도 한편으론 다른 여성과 불륜을 저지르는 인물이기도 하다. 영화 속 모습 그리고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적당히 나쁜 인물이고 또 결코 좋은 구석을 찾아볼 수 있는 인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죽일 놈이라고 한다면 너무 심한 것 같기도 하다고 웃는다.
“뭐 어떻게 봐도 나쁜 놈은 나쁜 놈인 것 같아요. 버젓이 아내가 있는데 다른 여자하고 바람을 피우고. 그러니 당연히 나쁜 놈이죠(웃음) 그 불륜이 나쁜 짓의 첫 단추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일을 시작으로 점점 나쁜 짓에 더 깊게 연루가 되가는 인물이죠. 한 번 실수를 저질렀는데 그걸 만회하려고 다른 짓을 하다가 더 일을 키우는. 뭐 어떻게 해도 좋게 봐주긴 힘든 놈이에요(웃음). 영화에서처럼 당해도 싸요. 하하하.”
배우 소지섭. 사진=피프티원케이
단 한 번도 작품 속에서 그려 본 적 없는 모습을 만들어 내기 위해 소지섭은 상당히 고생을 많이 했단다. 우선 보기와 다르게 소지섭은 작품을 하는 동안 굉장히 예민하단다. 특히 ‘자백’을 하는 동안에는 더욱 더 그랬다고. 촬영 초반에는 그래서 밤잠을 설쳤고, 급기야 악몽에 시달릴 정도였다고. 물론 고생만 한 건 아니다. 김윤진은 극중 소지섭이 연기한 ‘유민호’의 대사 거의 전체가 소지섭이 만들어 낸 센스였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우선 악몽은 실제로 너무 많이 꿨어요. 너무 힘들어서(웃음). 저 스스로가 원래 고민도 많고 예민하기도 해요. 스스로 걱정을 짊어지고 가는 성격이에요. 그나마 촬영 중반 이후부턴 감독님께서 각각의 장면에서 두 개, 많게는 네 개 정도 감정으로 나눠서 촬영을 하자 해주셨어요. 만약에 그냥 한 개의 감정으로 갔다면 저 너무 힘들었을 거에요(웃음). 그리고 대사는 윤진 선배가 너무 극찬을 해주신 건데, 제가 리딩 때 불필요한 말을 많이 줄였어요. 유민호는 말이 많으면 안될 것 같아서 그랬는데 감독님께서도 흔쾌히 동의해 주신 부분이고.”
‘자백’을 보고 있으면 연극을 보는 듯한 착각에 휩싸이기도 한다. 극중 소지섭과 김윤진 두 사람이 숲 속 산장에서 나누는 대화가 영화 전체의 흐름을 주도하는 동력이다. 때문에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의 대사량도 엄청나지만 그 대화를 통해 극의 자체의 플래시백이 좌지우지된다. 즉 구성 자체가 연극의 1막 2막 3막처럼 나뉘어져 있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배우 소지섭. 사진=피프티원케이
“사실 전 직접 출연한 배우라 잘 몰랐는데 주변에서 ‘연극 같다’는 말을 진짜 많이 해주셨어요. 그래서 다시 보니 진짜 그런 느낌도 강하더라고요. 저도 지금도 사실 되게 신기하긴 해요. 현장에선 굳이 ‘연극처럼 보이게 만들자’라고 하면서 신경을 쓴 부분은 없어요. 그저 한정된 공간이라 동선을 세밀하게 짜고 불필요한 대사를 현장에서 좀 더 다듬어서 촬영한 정도랄까. 아무튼 그렇게 보인다고 하니 오히려 기분이 좋아요.”
인터뷰 당시까지 ‘자백’은 개봉 전이었다. 소지섭은 ‘자백’이 큰 성공을 거뒀으면 좋겠단다. 만약 그렇게 되지 못한다고 해도 자신의 대표작 가운데 한 편으로 무조건 ‘자백’을 꼽을 수 있게 됐기에 너무 기분이 좋단다. 자신의 인생에서 최고 작품 TOP3를 꼽자면 그 중 한 편이 무조건 ‘자백’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전했다.
배우 소지섭. 사진=피프티원케이
“제 연기 인생에서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당연히 들어가야 할 작품이고, 영화는 제가 영화를 할 수도 있다고 자신감을 심어 준 작품이 ‘영화는 영화다’에요. 그 이후에는 제가 절 뚜렷하게 드러낼 수 있는 작품이 뭘까 싶고 저 스스로가 작품에 제대로 존재감을 심어 준 게 없는 것 같은데, ‘자백’은 자신 있게 제가 말씀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직도 많이 힘든 시기이지만 될 수 있으면 극장에서 꼭 ‘자백’ 많이 봐주셨으면 너무 감사드릴 것 같습니다.”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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