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익도의 밴드유랑)10년 만에 정규작 내놓은 ‘기생충’ 음악감독 정재일
내면 구원 갈구한 신묘의 잔향, 3집 ‘시편’
“역사의 쳇바퀴 속 무력한 개인”…팬데믹 시대 현대인 연상 시켜
입력 : 2021-03-04 06:00:00 수정 : 2021-03-04 08:43:54
[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대중음악신의 ‘찬란한 광휘’를 위해 한결 같이 앨범을 만들고, 공연을 하고,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TV, 차트를 가득 메우는 음악 포화에 그들은 묻혀지고, 사라진다. 어떤 이의 넋두리처럼, 오늘날 한국 음악계는 실험성과 다양성이 소멸해 버린 지 오래다. ‘권익도의 밴드유랑’ 코너에서는 이런 슬픈 상황에서도 ‘밝게 빛나는’ 뮤지션들을 유랑자의 마음으로 산책하듯 살펴본다. (편집자 주)
 
‘한(恨)’의 정서가 어둠 속 벼락처럼 떨어지는 계면조(界面調) 가락.  
 
뒤이어 따라붙는 화음의 아카펠라는 일렉트로닉 음향, 현악 앙상블과 뒤엉켜 거대한 ‘소리의 아고라’로 청자를 데려간다. 신묘한 소리의 잔향들이 도깨비불처럼 번쩍, 스테레오의 입체 세계를 빙빙 돈다.
 
“아직 치유되지 못한 거대한 슬픔 앞에서 그것을 기억하고 잊지 않는 것 말고는, 조무래기 작곡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영화 ‘기생충’의 음악감독이자 피아니스트 정재일이 10년 만에 정규 앨범 ‘시편(psalms)’을 내놨다. 3일 서면으로 만난 정재일은 “아주 작은 원룸 형태의 제 작업실에서 3달 정도 집중해 만들었다”며 “역사의 거대한 쳇바퀴 속 무기력하게 얹힌 개인의 삶에 관한 이야기”라고 소개했다.
 
지난해 장민승 작가의 영상 작품 ‘둥글고 둥글게’ 사운드트랙 일환으로 제작된 곡들을 다시 추리고 더해 총 100분 가량의 앨범으로 완성했다. 5·18민주화운동부터 1988년 서울올림픽까지, 한국 근현대사의 서슬퍼런 외침에 보내는 정재일 식 ‘소리 헌사’다.
 
정재일. 사진/(C) Young Chul Kim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의 외침, 그러나 그 안에서 끝끝내 기억해 내고 찾아내야만 하는 진실의 순간들을 마음속에 되새기며 만든 음악입니다. 거대한 역사 속의 제 자신과 저를 둘러싼 것들을 돌아보면서, 그 감정을 음악으로 기록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절규하고 탄식하는 정은혜의 구음은 새벽안개처럼 앨범 전체에 짙게 깔려 있다. 서양의 ‘단조’와 비슷한 계면조 가락이 부드럽되 슬픈 정서를 지배하고, 뒤이어 검은 연기가 겹쳐지듯, 합창과 선율들이 모여 화풍을 완성한다.
 
앨범을 대표하는 곡 ‘Memorare’은 실제 시편 ‘89:48’에 나오는 메시지와도 닿아 있다. ‘기억하소서, 제 인생이 얼마나 덧없는지를 당신께서 모든 사람을 얼마나 헛되이 창조하셨는지를.’
 
어쩐지 코로나 팬데믹 이후 오늘날 현대인들의 초상 같기도 하다.
 
“간절한 기도 혹은 제 자신에게 끊임없이 되뇌는 만트라를 표현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갖추게 된 음악 구성이라 생각합니다. 기도를 표현하기 위해 아무것도 덧입혀지지 않은 합창을 생각했고 기도문의 라틴어 구절들을 가사로 인용했습니다. 여성의 구음이 천둥소리처럼, 때론 바람소리처럼 존재해주길 바랐습니다.”
 
정재일. 사진/(C) Young Chul Kim
 
1990년대부터 재즈, 국악, 인디음악 등 국악과 양악을 아우르고 어릴 적부터 10여가지 악기를 다뤄온 그도 합창 아카펠라 작업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라틴어로 노래를 만들기 위해 영어와 한국어 번역본을 동시에 공부해야 했다”며 “기도와 선율의 어색함을 없애기 위해선 부다페스트의 합창 전문 지휘자의 조언을 받아 곡들을 완성했다”고 했다.
 
밴드 ‘긱스’ 출신에 박효신 '야생화' 등 대중음악 작곡, 타악그룹 '푸리', 소리꾼 한승석과의 작업, 국립창극단 작품 ‘트로이의 여인들’ 음악감독, 영화 OST... 
 
한국 대중음악의 여러 경계를 허물어 온 그는 “그때 그때 필요한 것들을 조합하며 필요한 형식을 취하며 반경이 넓어진 것”이라며 “크게 의도해 이룬 것은 없다”고 했다. 
 
또 지난해 영화 ‘기생충’의 OST 중 ‘소주 한 잔’이 ‘아카데미 시상식’ 주제가 상 예비 후보에 오른 것과 관련해선 “팬데믹이 2020년을 집어 삼키는 바람에 어안이 벙벙해 당시의 감정은 잘 생각이 나질 않는다”면서도 “반면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지?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던 거지? 하며 몽롱해지곤 한다”고 했다. 
 
“‘기생충’ OST 작업 이후 특별히 작업을 대하는 태도나 방식에 변화가 있진 않습니다. 다양한 장르를 만날 때 그에 맞는 어법이나 언어를 쓸 수 있어야 한다는 마음가짐은 그때도 지금도 계속되는 것 같습니다.”
 
정재일. 사진/(C) Young Chul Kim
 
세계적인 유행병 장기화에 대면으로 만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워 깜짝 질문을 했다. 앨범 발매 기념 인터뷰를 대면으로 했다면 어디가 좋았을지 묻자 시적인 답이 돌아온다.
 
“하루가 마무리 되는 잔잔한 강가에서 붉은 노을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인터뷰 하고 싶습니다. 아련함, 슬픔, 동시에 따뜻함을 느낄 수도 있고 이유 모를 눈물을 흘릴 수 있는 노을빛 아래서 속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번 앨범을 관통하는 정서를 “사람의 목소리, 기도하는 목소리”로 그는 설명했다.
 
“산 속의 오래된 사원 같은 곳에서 들어보면 좋을 앨범입니다. 내 안과 밖 이곳 저곳을 고요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곳.”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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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익도

자유롭게 방랑하는 공간. 문화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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