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원수경기자] '젊은 문화 게릴라 집단'. 동아시아 출판사가 내걸고 있는 정체성이다. 17년이라는 세월이 쌓인, 출판사로서는 꽤 오래된 곳이지만 동아시아에서 나오는 책들은 여전히 젊고 트렌디하다. 이 젊은 게릴라 집단을 이끄는 이는 한성봉 대표다. 따뜻한 봄날 남산 아랫자락에 둥지를 튼 동아시아에서 그를 만났다. 파마머리에 분홍 셔츠를 입은 그는 20년 가까이 회사를 끌어왔다고는 보이지 않을 만큼 젊어보였다.
한 시간 남짓 진행되는 인터뷰 시간 동안 한 대표가 가장 많이 한 말은 '가치'와 '소통'이었다. 출판사를 이끌며 고수해 온 가치이기도 하다. '젊은 문화 게릴라'로서 자유롭고 감각적인 움직임을 추구하면서 책의 가치와 책을 통한 소통이라는 묵직한 무게중심을 유지해왔다.
지난달 서울 중구에 위치한 동아시아 사무실에서 만난 한성봉 대표. 사진/원수경 기자
한 대표는 출판업계에서는 이례적인 코스를 밟았다. 대형 출판사에서 경력을 쌓은 뒤에 출판사를 차려 독립하는 것이 일반적인 길이라면 한 대표는 앞의 과정은 생략한 채 어느 날 갑자기 출판사를 만들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학교에서 강의를 했었는데 떠나야 할 상황이었다. 그 때 나이가 마흔이었는데 할 수 있는 게 없어 출판사를 차리게 됐다"고 설명했다.
"트렌드보다는 '어젠다'를 보죠"
한 대표는 자신이 만드는 책들에 대해 "한 시대의 트렌드를 실어 나르는 도구"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트렌드를 쫓지는 않는다. 출판도 문화산업인 만큼 트렌드를 따라야 하는 것은 맞지만 쫓아가는 것으로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문화산업 장르와 다르게 출판은 발이 느릴 수밖에 없다. 책 한 권을 만들기 위해서는 원고도 써야 하고 제작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출판이 문화적인 행위를 하려면 항상 트렌드에 반발 앞서야 한다"고 설명했다. 동아시아는 트렌드 대신 어젠다를 바라본다. 한 대표는 "어젠다를 지향하고 가면 트렌드가 쫓아오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지난 2월 고급레이저간섭계중력파관측소(LIGO·라이고)가 '중력파'를 탐지하는데 성공했다고 발표한 이후 약 보름 만에 관련 도서가 나온 것도 어젠다를 추구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설명했다. 중력파는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 이론에서 예측했던 존재로 101년 만에 확인되면서 과학계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큰 관심을 모았다.
동아시아가 '중력파' 원고를 받은 것은 검출 사실이 공표되기 한참 전인 지난해 9월이었다. 한 대표는 당시 중력파 검출 여부와 상관없이 원고 자체가 가지고 있는 가치의 소중함을 느끼고 출판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발표 유예 조건이 걸린 내용들을 빼고 원고를 준비하다 발표가 나오면서 원고를 수정해 2주 만에 출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는 12일 출간 예정인 '김대식의 인간 vs 기계'는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바둑대결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인공지능(AI)에 대한 사유를 담은 책이다. 유행에 맞춰 출간한 책처럼 보이지만 이 역시 오래 전부터 원고가 준비돼 있던 책이라고 설명했다.
인문학적 시선으로 읽는 과학책
출간 예정인 '김대식의 인간 vs 기계'나 최근 나온 '중력파', 초창기 동아시아의 이름을 알린 베스트셀러 '정재승의 과학콘서트' 등은 공교롭게도 모두 과학책이다. '과학 전문 출판사'라는 별명에 대해 한 대표는 "과학책만 내는 것은 아니다"며 "오히려 나는 과학을 모르고 부담스럽다"고 답했다. 그는 "특정 분야에 고집을 두지 않는다"면서 "다양성을 좋아하고 호기심이 왕성해 여러 장르를 건너다니고 서로 융합하는 것을 즐겨 한다"고 말했다.
한 대표는 과학책에 인문학적 시선을 융합했다. 그는 "과학책은 실험실을 벗어난 사람들의 이야기"로 "내 삶과 관련이 있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반인들은 유전자조작(GMO) 콩을 만들면 내 삶이 어떻게 되는가, 인공지능이 나와서 인류가 어떻게 되는가에 관심이 있다"며 "(책을 만들 때에도) 과학과 기술이라는 범위를 벗어나 인문학적, 철학적 영역으로 넘어가는 쪽에 관심이 있고, 우리 사회를 환기시키는 쪽에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
다만 유독 과학책이 많은 이유에 대해서는 과학이 이 시대를 이끄는 트렌드이자 어젠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한 대표는 "1970년대에는 문학 문집들이, 1980년대에는 사회과학 잡지들이 사회적 담론을 다뤘지만 21세기에는 과학이 담론을 구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책은 '가치'를 담아 '소통'하는 통로
한 대표가 책을 만들 때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소통'이다. 그는 "출판은 전통적으로 아카이빙(보관)과 대중과의 소통 두 가지를 함께 해 왔다"며 "과거에는 책을 보지 않더라도 찍어서 보관하면 그 자체로 기록물로서의 의미가 있었지만 인터넷 시대에는 그 의미가 사라졌고 소통의 의미가 더욱 강해졌다"고 설명했다.
원고를 볼 때에도 소통의 의미가 있는가를 반드시 따진다. 지난해 영화 인터스텔라 개봉에 맞춰 기획 출간한 '이종필 교수의 인터스텔라'를 예로 들며 "1000명이든 2000명이든 영화만 즐겼을 사람들이 책을 통해 우주론이나 우주물리학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면 소통의 의미가 분명히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소통에 앞서 보는 것이 '가치'다. 한 대표는 "원고를 볼 때 팔릴 것이냐 아니냐를 차치하고 한권의 책으로 가치가 있는가를 먼저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금 교보문고에 가면 30만권의 책이 있고 수많은 사람이 책을 썼지만 지금 여기 한 권으로 가치가 있다면 책을 내야한다"고 강조했다.
원고를 선택하는 마지막 기준은 "책의 물성(속성)"이다. 영상매체와 달리 책은 오롯이 시각으로만 텍스트를 읽는 행위다. 그는 "기호에 불과한 글자를 보며 상상하고 체계화하고 감동받는 것이 책의 속성"이라며 책이, 문자가 가지고 있는 언어적 특성에 부합한 텍스트 자체의 힘을 가진 원고를 선호한다고 설명했다.
자유로움 추구…"와이 낫?"
원고를 고르는 기준은 묵직하지만 동아시아의 콘텐츠가 무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한 대표는 "동아시아는 자유롭고 감각적으로 움직이는 곳"이라며 대중과의 소통에서도 자유로움을 중시한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세상물정의 물리학'을 낼 때 물리학에 세상물정을 더한 일이나, 872페이지에 달하는 '엘런 튜링의 이미테이션 게임'이라는 딱딱한 책을 내는가 하면 '빈둥빈둥 당당하게 니트족으로 사는 법'이라는 트렌디한 책도 낸 일 등에서 동아시아의 자유로움과 젊음에 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다. 한 대표는 "'이것이다'라고 규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바라보고 '와이 낫?'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많은 편"이라고 말했다.
출판계의 베테랑들을 데려오기 보다는 신입사원들과 함께 일하는 것을 선호하는 한대표의 성향도 한 몫 했다. 한 대표는 "기성 출판의 훈련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생각하는 사람들과 출판을 같이 고민하면서 그 사람들이 독특하고 뛰어난 에디터로 성장하는 것을 보는 것이 매우 즐겁다"고 말했다.
내 인생의 책 '욕망하는 천자문'
책을 만드는 한 대표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김근 서강대학교 교수가 쓴 '욕망하는 천자문'이다. 고등학생 때 아버지에게 천자문을 선물 받은 한 대표는 아들이 고등학생일 때 이 책을 선물하기도 했다. 아버지에게서 다시 아들에게로 3대가 지식을 나눈 책으로 "책을 만들며 지식을 나누고 전하는 사람으로서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게 한 책"이라고 설명했다.
한 대표는 이 책에 대해 "우리가 진리처럼 믿어온 유교의 이야기들이 지금 나에게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책"이라고 말했다. "천자문이라는 것은 동양의 생각을 천자 안에 응축한 것으로 항상 끊임없이 흘러간다"며 "살아있는 생명으로서의 학문을 느끼게 하는 책으로 고리타분한 한문의 세계지만 그것을 통해 살아있는 역동성을 느끼게 하는 책"이라고 덧붙였다.
원수경 기자 sugyung@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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