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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통의 1년…자살로 둔갑한 남편의 사고사
목격자 진술에도 자살로 단정…"끝까지 싸워 진실 밝히겠다"
2015-05-26 10:00:00 2015-05-26 10:00:00
지난 5월14일 밤 10시.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 고(故) 정범식씨의 첫 제사가 치러졌다. 부인 김희정씨와 고등학교 2학년인 큰 아들, 중학교 2학년 작은 딸, 세 식구가 제사상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제는 미망인이 된 김씨는 생전에 남편이 좋아했던 음식을 준비하면서 아리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첫 만남부터 결혼에 이르기까지, 즐거웠고 고단했던 삶이 떠올랐다. 큰 아들은 살아생전 “아빠가 떨어져 있으니, 엄마와 동생을 잘 보살펴야 한다”는 아버지 말이 오늘따라 유난히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남편의 제사상에 절을 하던 김씨는 흐느낌이 새어 나올까 입을 틀어막았다. 자식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남편의 영정사진을 보는 순간,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남편의 죽음이 자살로 둔갑한 지 1년이 흘렀다. 진실을 밝혀 억울함을 풀어주겠다던 남편에 대한 김씨의 마지막 약속은 점점 희미해져가는 불씨와 같이 나약해져 갔다. 그저 힘없고, 돈 없고, 배경 없고, 많이 배우지 못한 자신만 탓할 뿐이었다.
 
이들 가족에게 남편이자, 아빠를 앗아간 사건은 정확히 1년 전에 일어났다. 지난 2014년 4월26일 현대중공업 하청 노동자인 정범식씨는 현대중공업에서 샌딩 작업을 하던 중 에어호스에 목이 감긴 채 숨지는 사고로 사망했다.
 
당시 울산 동부경찰서 수사 결과, 자살로 내사 종결되자 갖가지 의혹이 터져 나왔다. 이후 2014년 10월 국정감사에서 울산경찰청이 재수사를 검토하겠다고 답변해 수사가 다시 진행됐지만 결과는 번복되지 않았다. 유족이 이에 불응, 수사기록 공개를 요구하자 내부 심의위원회 심의 결과 수사기록을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며, 필요하면 행정소송을 진행하라는 매몰찬 답변만 돌아왔다.
 
지난 15일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 고(故) 정범식 씨의 부인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뉴스토마토
 
취재팀은 지난 15일 성남에서 김씨를 어렵게 만났다. 여러 경로를 통해 수차례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생계와 지친 심신 탓에 거절 의사를 밝혀 왔던 그다. 잊고 싶은 악몽 같은 기억을 또 다시 떠올리기 싫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족의 아픈 가슴에 또 한 번 못질을 할 것 같은 생각에 더 이상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며칠 뒤 뜻밖의 연락이 왔다. 산업재해 관련 취재 때문에 찾은 울산 산재추방운동연합의 현미향 사무국장의 적극적인 권유로 인터뷰를 결심하게 됐다는 것이다. 억울한 사실을 언론을 통해서라도 세상에 알려 남편의 왜곡된 죽음을 바로잡고 싶다는 결심이었다.
 
김씨는 올 3월부터 일주일에 한 차례씩 민주노총 성남지부 사무실에서 심리치료를 받고 있다. 지난 1년간 겪은 슬픔과 억울함이 우울증으로 심화돼, 병원에 입원해야 할 만큼 상태가 좋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김씨는 신경정신과 진료도, 일체의 약도 거부하고 있다. 경찰이 남편이 과거 8년간 5차례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는 기록을 ‘자살’의 결정적 근거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정신과 치료 받으면 무조건 자살인가요?”
 
경찰은 ▲정신과 치료 ▲가정불화 ▲경제적 어려움 등을 자살의 동기로 지목했다.
 
이에 대해 김씨는 “경찰이 남편을 마치 심각한 정신적 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으로 몰아갔다”면서 “과거 8년간 5차례 치료를 받았고, 망상장애에 대한 인식을 스스로 하고 있을 정도로 심각하지 않았다”고 조목조목 반박했다.
 
그는 “경찰은 어두운 작업환경에서 일하는 고인의 시력이 0점대인 점과 각막의 이물질 제거 등의 이유로 2년간 5차례 안과에서 치료를 받은 점 등 사고 가능성을 애초부터 배제하고 편파적인 증거수집과 분석으로 자살로 몰아갔다”고 하소연했다.
 
김씨는 가정불화와 경제적 어려움에 대해서도 “2013년 12월과 2014년 1월 이혼을 암시하는 SNS 내용만 발췌해 가정불화로 몰고 갔으나, 이후 4월까지 우리 부부 사이의 애정을 확인할 수 있는 문자 메시지를 모두 묵살하거나 조사하지 않았다”면서 “또 휴대폰 요금 미납(10만원가량)과 일부 카드 값 연체 사실을 경제적 어려움의 요인으로 들었지만, 이 역시 설득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월 500만원가량의 급여를 받는 남편이 변제할 수 없는 수준의 부채가 아니라는 게 김씨의 설명이다.
 
그러면서 경찰의 부실하고 결론을 미리 짜놓은 왜곡수사가 남편을 자살로 둔갑시켰다고 울분을 토했다.
 
정씨는 사고 당일 오전 10시부터 10시20분 사이에 휴식을 취하던 동료들에게 “작업에 쓰이는 리모컨에 오작동이 있다”며 기계 오작동을 미리 경고했다. 실제로 2차 현장 감식 과정에서 사고 당시 사용한 전기선에서 결함이 발견됐고, 고인이 작업했던 송기 마스크 상태가 현장에 어지럽혀져 있는 등 황급히 빠져 나오려고 했다는 점에서 기계 오작동의 개연성이 높지만, 울산 동부서는 이에 대해 아무런 수사도 진행하지 않았다는 게 유족 측 주장이다.
 
전기선 결함이 있을 경우 작업을 제대로 할 수 없을뿐더러, 에어호스 장애로 호흡이 곤란해지는 등 생명을 위협하는 중대 사안이라고 현장 동료들은 입을 모았다.
 
정범식 씨의 부검감정서에서 감정의원은 인위적인 매듭이 형성됐기 때문에 변사자의 사인을 스스로 목맴(의사)에 더욱 부합하다는 소견을 냈다. 사진/뉴스토마토
 
◇부검위 소견 정면 반박…“사측·경찰, 인위적으로 매듭 훼손”
 
취재팀이 입수한 정씨에 대한 부검감정서에는 경부압박질식사로 인한 ‘의사(Hanging)’에 부합하다는 소견이 제시됐다. 부검위는 정씨가 4m 지상에 설치된 작업장에서 사고를 당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인위적인 매듭이 형성돼 스스로 목맴(의사)에 더욱 부합하다는 의견을 냈다. 경찰은 이를 근거로 자살로 결론 내렸다.
 
사고현장을 제일 먼저 목격한 노조 집행간부인 윤ㅇㅇ씨의 목격자 진술서에는 결정적 증거인 에어호스 매듭을 현대중공업 안전환경부 직원과 서문기업 직원들이 인위적으로 매듭을 "풀었다 감았다"하는 행위를 목격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당일 11시50분경 사고 현장을 최초로 목격한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노동안전보건부장 윤모씨는 “사고현장 헨드레일에 에어호스가 감긴 것을 안전환경부 관계자(현대중공업)와 서문기업(하청) 직원들이 에어호스를 ‘풀었다, 감았다’ 하면서 손댔고, 12시36분경 경찰관 6명(추정) 역시 반복적으로 에어호스의 매듭에 손을 댔다”고 진술했다.
 
경찰이 제시한 결정적 증거인 매듭의 최초 형태는 더 이상 알 수 없게 훼손된 것이다. 때문에 매듭 형태의 에어호스는 증거로써 더 이상 가치가 없을 뿐 아니라, 사건의 핵심인 현장보존이 미흡했음에도 경찰 수사는 이런 점들을 염두에 두지 않고 진행됐다.
 
김씨는 인터뷰 말미에 남편이 자신에게 했던 마지막 말을 꺼냈다.
 
“남편은 지난 12년 동안 조선소에서 하청 노동자로 일하면서 제대로 쉬거나 여행 한 번 다녀오지 못했다. ‘5년 뒤 일을 그만두면 남들처럼 여행도 다니고 등산도 가자’면서 (울산으로) 내려갔는데, 그렇게 영영 떠날 줄 몰랐다”며 참았던 눈물을 끝내 터트리고 말았다.
 
김씨는 각오도 다시 새겼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큰 회사를 상대로 이기기는 어렵다. 말로만 가족이라고 할 뿐, 힘들게 일하는 노동자는 한낱 먼지에 불과하다”면서 “또 다른 억울한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끝까지 싸워 진실을 밝힐 것”이라고 스스로를 추슬렀다.
 
김영택·이순민 기자 ykim98@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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