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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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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바위그림)고니를 숭배한 신석기 부족

(백야의 땅, 박성현의 바위그림 시간여행-④)

2023-12-04 06:00

조회수 : 1,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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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 아래에 위치한 페노스칸디아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핀란드, 러시아의 콜라반도와 카렐리아 지역을 가리킵니다. 세계 곳곳에서 선사 인류의 바위그림이 발견된 것처럼, 이곳에도 수천 년 전 신석기인들이 남긴 바위그림이 있습니다. 그들은 물가의 돌에 무엇을, , 새겼을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 질문을 품은 채 떠난 여정, 러시아 카렐리야의 오네가호수와 비그강, 콜라반도의 카노제로호수에 새겨진 바위그림과 노르웨이 알타 암각화를 향해 가는 시간여행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오네가호수 위치.이미지=박성현
 
 
베소프노스 ‘3인조의 의미와 그들의 이웃
 
후대인들이악마라고 이름 붙인 의인화 형상의 몸은 중앙의 수직선에 의해 세로로 나뉘어져 있다. 고대의 예술가는 원래 있던 바위의 균열을 이용해 이 거대인간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좌우대칭으로 한가운데서 갈랐다. 왜 그랬을까? 중세 사람들이 악령의 산물로 느낀 것처럼, 신석기인들은 과연 어떤 악한 존재 내지 최소한 두려운 존재를 형상화한 것일까? 아니면 큰 힘과 권력을 가진 정치적 지도자거나 영적 지도자였을까? 혹은 사냥을 잘하는 영웅이었을까? 그런데 묘사된 몸과 자세를 보면 다른 추측도 가능하다. 이 인물은 양손의 손가락을 펼치고 두 팔을 위로 뻗고 있다. 벌려진 다리의 무릎은 구부러져 있고 직사각형 모양의 몸은 아래쪽으로 가면서 넓어진다. 눈은 크고 동그랗게 떠져 있고 입은 열려 있다. 마치 출산을 상기시키는 모습이다. 바위의 균열은 종종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로 해석된다. 이 인간의 몸을 세로로 가르는 균열은 영계에서 현세로 나오는 새로운 존재의 탄생 순간을 의미한 것은 아닐는지?
 
일명 '악마'로 불리는 의인화 형상. 베소프노스곶. 사진=박성현
 
베소프노스의 3인조가 동시에 제작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른바악마와 더불어 그 양옆의 모캐(또는 메기)와 수달(또는 도마뱀) ‘3인조로 불리게 된 이유는 셋 다 2미터가 넘는 큰 크기로 한 공간에 새겨졌기 때문이다. 큰 크기로 강조된다는 것은 당시 이곳에 거주하던 사람들에게 그만큼 중요한 가치가 있었다는 뜻이다. 식량이 돼 주는 사냥감들은 중요하게 간주되고 숭배되며 후대의 신화와 전설 속에 등장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푸도시 박물관의 동상에서 보이듯이, 모캐는 이 지역에서 여전히 중요한 낚시 대상이다. 수달 숭배의 흔적은 유라시아 북부를 비롯해 세계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예를 들어, 북유럽 신화에서 마법사 흐레이드마르의 아들 오트르는 낮에 수달의 모습으로 물고기를 잡아먹고(그러다가 로키에 의해 살해되지만), 서시베리아 북쪽에 사는 셀쿠프족은 수달을 물과 지하세계의 주인인 강한 영혼으로 여겼다. 러시아의 연구자들은 3인조가 있는 베소프노스곶을 신성한 제례 공간으로 추정하고 모캐와 수달을 제의(祭儀) 때 바쳐진 공물로 해석하기도 한다.
 
베소프노스의 암각화 전경. 일명 '악마' 옆으로 사슴과 고니, 물새들이 보인다.사진=박성현
 
3인조의 주변에는 여러 다른 이미지들도 볼 수 있는데, 거대인간의 오른손 옆에는 철갑상어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엘크와 고니를 비롯한 물새들도 여럿 보이고 심지어 벨루가를 사냥하는 장면도 찾을 수 있다. 한 가지 부언하자면, ‘희다는 뜻의 러시아어에서 유래한벨루가는 영어로흰고래를 뜻하지만 러시아어로는철갑상어를 가리킨다. 19세기까지는 러시아에서도 이 고래를 뜻하는 말로 벨루가가 벨루하와 혼용되었는데 현대 러시아어에서는벨루하로 쓰게 됐다. 그래서 러시아의 유명한 보드카 벨루가는 병에 철갑상어가 그려져 있다. 본론으로 돌아와, 호숫가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벨루가 사냥 이미지를 볼 수 있는 것은 백해 거주자들과의 연관성 때문일 것이다. 물론 백해 암각화에서 만나게 될 고래사냥 그림과는 비할 바가 아니긴 했으나 배와 고래가 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었다.
 
백조의 호수오네가호, 암각화의 주인공은 고니!
 
물새는 오네가호 암각화 전체 표현물의 40% 이상을 차지하는데 그중에서도 고니가 으뜸이다. 보통백조라는 말이 더 흔히 사용되지만고니라는 순우리말의 예쁜 이름이 있으니 그렇게 부르기로 하자. 고니와 다른 물새들은 베소프노스곶에도 있고 페리노스곶이나 클라도베츠곶에도 많이 있다. 물새 그림은 코치콥나볼록반도에 제일 많지만 내가 머무는 곳과는 멀어서 배를 타고 40분가량 가야 했다. 떠나기 전날 비바람이 멎길 기다려 겨우 찾아간 그곳에선 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해 아쉬움이 크게 남았다. 코치콥나볼록반도의 레베지니노스(백조곶)에는 4m에 달하는 가장 큰 고니가 있는데 윤곽선으로 단순하게 새겨져 있다. 연구자들에 의하면 이것은 여러 모양의 고니들 중 후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클라도베츠곶의 암각화. 물가 바위에 새겨진 고니들과 사람의 형상을 볼 수 있다.사진=박성현
 
고니의 형상은 다양하다. 다수는 목이 비현실적으로 길게 묘사돼 있고 바위의 균열이 활용됐다. 목을 왜 이토록 길게, 강조해서 묘사한 것일까? 반원 모양의 몸통은 면새김으로 깊이가 느껴지거나 선새김으로 윤곽선만 표시되기도 하고, 그 안에 아치형 선각이 여럿 포함되어 줄무늬를 이루기도 한다. 배의 이물이 고니 머리 형상으로 장식된 이미지도 있다. 고니 한 쌍은 몸 내부의 아치 모양이 다리처럼 연결돼 있고 서로를 마주보고 있어 더욱 눈길을 끈다. 고대의 예술가는 왜 이런 형상을 새긴 것일까? 구애의 순간을 목격한 것일까? 금실 좋은 부부를 기원한 것일까? 아니면 뗄 수 없는 인연을 상징한 것일까?
 
고니의 목이 바위의 균열을 따라 표현된 것이나 고니의 머리가 물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모습은 특히 흥미롭다. 베소프노스의 의인화 형상을 가르는 균열선처럼 이 틈새선을 고니의 특징적인 긴 목으로 묘사한 것은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고니의 능력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오네가호수에서 암각화를 제작했던 신석기 부족은 지상과 수중, 지하세계 또는 영계를 자유로이 오가는 이 신비로운 능력자에 대한 숭배를 감추지 않았다.
 
클라도베츠곶의 암각화. 의인화된 형상이 고니와 연결돼 있다.사진=박성현
 
오네가호수 암각화의 대표적 이미지인 고니는 1930년대에 진행된 초기 연구 때부터 암각화 집단의 토템으로서 해석돼 왔다. 토템이라면 특정한 부족·씨족 사회집단의 상징물이고 조상과 같은 혈연적 관계가 있다고 믿어지는 신성한 존재인데, 그에 걸맞게 고니는 세계의 많은 신화들에 등장한다. 고니로 변신해서 스파르타의 왕비 레다를 유혹한 제우스도 있지만, 다양한 민족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는 고니가 처녀로 변신하고 처녀가 고니로 변신하는 모티프가 흔하다. 청년이 목욕하는 고니처녀에게서 깃털 달린 옷을 훔쳐 그녀가 다시 고니로 변하지 못하게 하고 지상에 머물게 만드는 이야기에는 여러 버전이 있다. 우리에게는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바위그림을 보러오는 사람들
 
처음에는 다른 러시아인들과 함께 안내자 게르만을 따라나섰지만 간단간단히 훑고 지나가는 암각화 투어그룹을 계속 쫓아가면서 답사를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관찰하면서 호젓이 촬영하기 위해 나는 베소프노스에 혼자 남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게르만은 그들이 가는 다음 코스인 페리노스곶의 방향을 손으로 가리켜 설명한 후, 이곳과 그곳에서 내가 있고 싶은 만큼 오래 있다가 강을 건너올 때 소리쳐 부르면 배를 타고 데리러 오겠다고 말했다. 사실 전문적인 단독 안내를 기대했었기에 좀 난감하기는 했다. 처음 방문하는 사람이 암각화 지점들을 스스로 찾는 것은 매우 어려운 데다 나는 심한 길치여서 더 걱정스럽기도 했다.
 
샬스키 마을에서 온 일행. 아르한겔스크에서 온 부부를 마을 주민(가운데)이 안내해 암각화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사진=박성현
 
다행히 첫날은 운이 좋았다. 베소프노스에서 작업이 끝날 즈음 샬스키 마을에서 온 다른 일행을 만난 것이다. 오네가호 동쪽 연안을 따라 늘어서 있는 암각화 지점들 중 샬스키 마을은 북쪽에 있고 베소프노스는 남쪽에 있어 그들은 배를 타고 한참을 온 것이었다. 아르한겔스크에서 온 부부를 안내해 온 샬스키 마을 주민은 더 꼼꼼히 설명하고 보다 많은 그림들을 보여주려고 애썼다. 덕분에 베소프노스를 복습한 후 친절한 이 일행을 따라 헤매지 않고 다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암각화를 찾아가는 숲속 길에는 가문비나무와 소나무, 자작나무들이 모여 있고 블루베리와 링곤베리가 숨어 있다. 숲속 식물을 보면서 그리고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누면서 우리는 페리노스곶에 도착했다. 함께 그곳의 바위그림을 둘러본 후 바쁘게 길을 서두르는 그들을 보내고 나는 다시 혼자 남았다. 그리고 물새와 묘한 기호들을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위에서 내려다 본 페리노스곶의 일부.사진=박성현
 
박성현 경상국립대 학술연구교수 percepti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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