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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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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범종입니다.
착한 중독, 나쁜 중독

2023-09-04 19:03

조회수 :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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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기와 혈흔, 비명과 주검. 인기 있는 창작물의 단골 재료입니다. 그런데 이 재료를 어느 그릇에 담았는지에 따라 맛집이라 평가 받기도 하고, 먹지 않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기도 합니다.
 
칭찬 받는 쪽은 영화와 드라마입니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는 칸 영화제와 청룡영화상 등 국내외 수많은 상을 휩쓸며 박수 받았습니다. 450명 넘는 사람이 잔인하게 죽는 과정을 보여준 드라마 '오징어 게임'도 골든글로브와 백상예술대상 등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한국의 자랑스런 문화 상품으로 추앙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폭력이 게임이란 매체에 담겼다면 어떤 평가를 받을까요? '범죄의 원인'이 됩니다. 최근 검찰이 신림동 흉기 난동 살인 사건 원인으로 '게임 중독'을 지목하자 게임계는 또 한숨을 쉬었습니다.
 
한 게임 업계 관계자는 "OO일보에서 썼더라고요. 또 게임 탓으로요" 라며 쓴 웃음을 지었습니다.
 
저는 게임과 함께 자란 세대가 검찰의 비논리를 비웃는다고 말했지만, 게임 업계가 선입견으로 받은 상처는 깊었습니다.
 
서울중앙지검이 8월11일 발표한 신림동 흉기난동 살인 사건 수사 결과 보도자료. (사진=검찰 보도자료)
 
행정적으로나 법적으로 정의된 개념이 아님에도 검찰은 게임 중독이 불특정 다수에 대한 살해 시도 원인이라고 했습니다. 보도자료에 적힌 이중잣대를 살펴보겠습니다.
 
“피고인은 게임 플레이어가 1인칭 시점에서 무기나 도구를 이용해 전투를 벌이는 '1인칭 슈팅(shooting) 게임'에 빠져 있었고, 타인을 공격하여 살해 하는 내용의 게임 영상도 장시간 시청하며, 범행 당일 아침에도 휴대전화로 게임 동영상을 시청.”
 
검찰의 발표가 왜 이중잣대인지 생각해봅시다. 콘텐츠의 흥행 요인은 보고 또 보고 싶은 중독성입니다. 만화 슬램덩크는 1990년대 작품이지만, 사람들이 계속 읽고 싶고 떠올리고 싶은 작품이기에 지난해 연말 '더 퍼스트 슬램덩크' 흥행으로 이어졌습니다.
 
대표적인 OTT 서비스인 넷플릭스엔 다음편 자동 재생 기능이 있습니다. 한 자리에 앉아 정주행했다는 말이 작품에 대한 칭찬입니다. 배우들은 유튜브 넷플릭스 채널에 나와 'n차 시청'을 이야기합니다. 영화계에서도 'n차 관람'이란 표현이 아무렇지 않게 쓰입니다.
 
TV 시청 습관도 중독입니다. 일일연속극을 놓치면 큰일 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그 드라마 시청 행위에 중독 돼 있습니다. 즐거운 행위는 반복하고 싶으니까요. 포르노처럼 자극적인 뉴스 공급과 소비 행태는 과연 중독성과 관련이 없을까요.
 
한 신문에선 청소년이 편법으로 잔혹한 게임을  즐길 수 있어 문제라고 했지만, 당장 거실 스마트TV에 설치된 넷플릭스를 얼마나 쉽게 켤 수 있는지 생각하면 헛웃음이 나옵니다.
 
영화를 따라한 살인이 있다고 해서 영화계가 손가락질 받지는 않았습니다. 2012년 영화 '다크나이트 라이즈' 개봉 당시, 전작 '다크나이트'를 보고 자신을 조커라고 생각한 범인이 영화관에서 총기를 난사해 12명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예술로, 범인은 그냥 범인으로 명확한 선긋기가 이어졌습니다. 관념은 논리와 다릅니다. 영화와 드라마가 입은 옷에는 명예와 자본이 씨줄과 날줄로 엮인 반면, 게임은 천박하므로 그 옷을 한 번 만져보지도 못합니다.
 
한국에선 서로를 경쟁과 혐오, 원한으로 내모는 관념과 행위를 돌아보지 않은 채, 그로 인해 나타난 현상의 원인으로 게임만을 지목하는 관행이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이 편하고 게으른 태도는 불행을 반복하는 지름길입니다. 어떤 잔혹한 범행이 일어나도 게임 탓을 하면 게임만 얻어맞고 인민재판이 끝납니다. 그리고 병든 사회에 대한 성찰은 관심에서 멀어지는 일이 계속되겠지요.
 
업계 내 자성도 필요합니다. 별다른 고민 없이 확률형 아이템 장사에 의존해온 한국 게임사들과, 이런 게임을 계속 해주는 게이머들 역시 게임에 대한 색안경을 만든 책임을 같이 지고 있습니다. 구경하는 사람도 감동할 수 있는 패키지 게임이 늘어난다면, 게임에도 영화처럼 훌륭한 이야기와 연출이 있다는 인식이 자연스레 퍼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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