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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소에 관한 단상(斷想)
2020-08-18 06:00:00 2020-08-18 06:00:00
생사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울음조차 두려웠을까. 울음 대신 운명의 시간을 받아들이는 긴장과 침묵이 소의 뿔처럼 단단하고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하여 또다시 그 상황이 소의 죽음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물에 젖은 소도시처럼 범람하고 있을 때, 사람들이 소의 몸을 밧줄로 휘감았다. 그리고는 지붕으로 피해간 공포를 지상으로 천천히 걷어내고 있었다. 살았다. 소가 살았다. 함께했던 가족과 동료를 떠나보낸 슬픔이 소의 눈에 맺혀 있었다.  
 
며칠 전 텔레비전에서 본 전라남도 구례군의 어느 축산농가에서 있었던 소 구출 장면이다. 그 눈이,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난 소의 그 눈이, 쉬 잊히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최장의 장마가 전 국토에서 할퀴고 간 상처 속에서도, 격한 슬픔 속에서도, 기쁨이 피어날 수 있다는 메시지로 읽혔다. 어느 신문에서는 역시, 구례군의 한우 세 마리가 67km를 헤엄쳐 살아났다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생명이란 인간과 동물을 가리지 않고 질기고 질긴 것이다. 더불어, 수마가 휩쓸고 간 상흔은 악조건 속에서 희망도 공존한다는 작은 불씨를 던져주고 간 것 같다.
 
먼 거리까지 떠내려간 소는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장마가 계속되는 상황에서도 살아난 소를 통해 생각나는 고사성어가 있다. ‘우생마사(牛生馬死)’가 바로 그것이다. 
 
이 말에는 홍수가 났을 때 힘이 센 말은 자신의 빠름과 힘만 믿고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려다 힘이 빠져 죽음을 맞이하지만, 소는 물살에 몸을 맡기고 유유히 떠내려가면서 조금씩 뭍으로 나가 목숨을 건진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14세기에 중국의 나관중(羅貫中)이 장회소설(章回小說)의 형식으로 편찬한 장편 역사소설인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는 유비가 자신을 죽이려는 무리를 피해 적로마(的盧馬)를 타고 달아나다가 깊고 넓은 강에 앞길이 막히는 사면초가의 상황이 나온다. 하지만, 그때 유비는 자신이 타고 있던 적로마가 갑자기 물속에서 몸을 일으키며 한꺼번에 10여 미터나 날아가 준 덕분에 추격자에게서 벗어나게 된다. 물론 소설 속의 한 장면이지만, 실제로 말은 의외로 헤엄을 잘 치는 동물이라고 한다. 
 
반면에 소는 수영을 못해서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고 물살에 몸을 맡긴 채 떠내려가다가, 조금씩 강가에 접근하며 얕은 곳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빠져나와 목숨을 건진다. 우생마사에는 이런 함의가 있다. 즉, 거칠고 센 물살 속에서 헤엄을 잘 치는 말보다는 묵묵하게 적응해가는 소가 살아남는다는 뜻이다. 비슷한 뜻으로 통용되는 치망설존(齒亡舌存)은 단단한 이는 빠져도 부드러운 혀는 남는다는 말인데, 강한 자가 먼저 망하고 부드러운 자가 마지막까지 살아남는다는 우의를 품고 있다. 우생마사와 함께 곱씹어봐야 할 사자성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살다 보면, 이 고사성어가 뜻밖에 우리의 인생사에 이어질지도 모른다. 급변하는 환경에 살아남는 방법의 하나로, 소와 같이, 변화하는 시대의 환경 변화를 잘 읽으며 점차 자신만의 기회를 찾아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정답이 없는 무한 경쟁에 놓여 있다. 한 번쯤은 이 우생마사의 지혜를 되새겨볼 만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흔히 쓰는 ‘우보(牛步)’라는 말도 의미 있게 들린다. 소의 걸음이란 뜻. 세상살이에 느린 걸음이 무슨 말인가 할 수도 있겠지만, 바쁘게 변화를 시도하는 트렌드에는 뜻밖에도 우보가 살아남는 방법으로 작용할지도 모른다. 
 
한편, 소는 서양에서는 상승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읽히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뉴욕증시에서 상승장을 뜻하는 말이 ‘불 마켓(Bull Market)’이다. 하락장을 의미하는 ‘베어 마켓(Bear Market)’과 대립 개념이다. 불은 황소고, 베어는 곰이다. 뉴욕 월가에 있는 황소상이 그런 사고를 반영한다. 그것은 이 두 동물이 싸움을 준비하는 자세의 차이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는데, 황소는 뿔을 세우고 하늘을 향하지만 곰은 바닥으로 자세를 낮추고 싸움에 임한다. 투자자들에게는 황소가 복을 불러다 주는 동물로 인식되는 셈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소는 인간의 역사와 생활 속에 자리한 동물이다. 또한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한 삶의 동반자다. 장마에도 살아난 한우처럼, 상승을 상징하는 뉴욕 월가의 황소상처럼, 우리의 일상에도 소와 같은 생명력, 혹은 발전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제 여름도 얼마 남지 않았다. 곡식과 과일 잘 익으라고 하늘이 그동안 숨겨왔던 볕을 마음껏 발산할 것이다.     

오석륜 시인/인덕대학교 비즈니스 일본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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