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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한명숙 사건' 재조사, 신중해야
2020-05-27 06:00:00 2020-05-27 17:40:44
누구나 자신의 유죄확정판결에 대해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다. 판결의 부당함을 시정하기 위해 재심절차도 법에 마련되어 있다.‘약촌오거리 살인사건’이나 죽산 조봉암 선생도 모두 재심절차를 거쳐 누명을 벗었다. 최근인 지난 26일에는‘10·26 사태'로 사형을 선고받은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유족이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법원의 확정판결을 존중하는 것은 판결을 선고한 법관들에 대한 예우가 아니라 법질서 안정과 법치주의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만일, 법원판결에 대해 법에서 정한 절차가 아닌 방식으로 특정인을 구제하거나 불복을 허용한다면 그 사회는 곧 붕괴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치권 일각에서 지난 2015년 대법원이 한명숙 전 총리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를 유죄로 확정한 판결에 대해 재조사하자는 목소리가 높다. 법무부도 진상조사에 나설 움직임을 보인다. 정치자금 공여자인 한만호의‘비망록’이 10년 만에 공개됐고, 당시 검찰의 강압수사가 있었다는 이유에서다.  
 
한 전 총리 사건에 대한 재심 주장이 나오지만 녹록치 않다. 재심은 유죄확정판결의 증거물이나 증언이 허위인 것이 확정판결에 의해 증명될 때, 검사 등이 직무에 관한 죄를 범한 것이 확정판결에 의해 증명될 때, 또는 확정판결을 파기할 고도의 개연성이 있는 새로운 증거가 발견될 때 가능하다. 그러나 한 전 총리 사건은 이런 재심이유가 당장 눈에 띄지 않는다.  
 
언론에 보도된 한만호 ‘비망록’은 이미 한 전 총리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1심 재판부가 증거로 채택한 문건이다. 당시 재판부는 판결문에 '구치소에서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노트'라는 이름을 달아 이를 증 제630호로 기재했다. 증거판단은 물론 심증형성에도 영향을 끼쳤다. 즉 새로운 증거라고 볼 수 없다. 1심은 검찰의 강압수사도 인정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한 전 총리의 동생이 1억 원 수표를 전세자금으로 사용한 것을 1심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봤다. 
 
재심이 어렵다면 입법으로 재조사를 추진할 여지가 있기는 하다. 당시 검찰이 증인에 대해 모해위증을 교사했다는 의혹도 전해진다. 그런데 우리 헌정사에서 유죄판결이 확정된 사건의 재조사를 위해 법령이 제정된 예가 있는지 알 수 없다. 설령 입법을 추진하더라도 이는 불행한 선례를 남길 우려가 있다. 만일 언젠가 정권이 바뀌어‘박근혜 재조사’가 도입되는 것을 상상해보자.  
 
검찰과거사조사위원회에서도 김학의나 장자연과 같은 민감한 사건을 다뤘지만 한 전 총리 사건은 언급도 되지 않았다. 이는 확정판결이 난 사건을 재심이라는 제도가 아닌 방식으로 구제하는 것은 법치주의 근간을 뒤흔든다는 것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번 논란과 관련해서는 검찰개혁에 속도를 내기 위해 법무부가 움직이는 것이라는 풀이도 나돈다. 검찰의 수사방식이 상당한 논란을 야기했기 때문이다. 당시 검찰은 구치소에 수감된 한만호를 무려 70회 이상 조사했음에도 불과 1회의 진술서와 5회의 진술조서만을 남겼다. 60회가 넘게 조사한 것은 아무런 자료가 없다.
 
전원합의체로 진행된 상고심에서 다수의견의 '전부 유죄' 판단에 반대한 대법관 5명은 한 전 총리에 대해 인정된 불법정치자금 9억 원 중 6억원을 무죄로 판단하면서 “한만호를 상대로 증거를 수집하면서 법이 정한 절차에 따르지 않아 증거능력이 부정되는 정도까지 이르지는 않았더라도 수사기관의 진술증거 취득과정을 투명하게 함으로써 그 과정에서의 절차적 적법성이 지켜지도록 하는 수사의 적법성 보장원칙에 반하는 것”이라고 엄중히 지적했다.
 
법무부가 당시 검찰 수사의 문제점에 대해 재조사한다면 이는 충분히 명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일반 형사범을 다루는 경찰에게 수사종결권이 인정됐고, 고위공직자를 수사대상으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도입된 만큼, 수사기관 전반에 걸친 보다 공정하고 적법한 수사절차를 강구하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 더 나아간다면 일반 국민들과의 형평에도 반하고 불행한 선례를 남기게 된다. 당장 7월에 탄생하는 공수처는 적어도 한 전 총리를  수사했던 검사들과는 달라야 하지 않을까.
 
김한규 법무법인 '공감' 변호사(전 서울지방변호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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