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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누가 '박사'라는 괴물을 키웠나
2020-03-25 06:00:00 2020-03-25 06:00:00
일명 ‘n번방 사건’의 핵심 인물 중 하나인 ‘박사’ 조주빈이 구속되자 포털 실시간 검색어에는 ‘텔레그램 탈퇴’가 급상승했다. 탐사보도를 통해 공개되고 조주빈의 구속 전 피의자심문에서 소명된 범죄혐의를 바탕으로 추정하면 일종의 ‘증거인멸 시도’다. 
 
작년 이맘때쯤 ‘승리·정준영 사건’으로 ‘디지털 성범죄’가 국민적 공분을 일으킬 당시 성범죄자들이 모인 한 인터넷 카페에서 ‘몰카범’들이 동요하던 모습이 생각났다. 당시 그들은 몰카 범죄가 이슈화되면서 ‘평소와 달리’ 실형을 받을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실제로 그들 대다수는 불기소 처분이나, 재판에 가더라도 벌금형이나 집행유예를 받은 경험을 공유했다. 변호사를 통해 피해자에게 처벌불원서를 받아내는 건 필수였다. 오래 전부터 적지 않은 피해자들이 수치심에 세상을 등지는데도 바뀌지 않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그해 여름 ‘소라넷’을 운영한 두 부부 중 한 명만이 징역 4년을 선고받는 항소심을 지켜봤다. 몇 달 뒤엔 해외에 서버를 두고 아동 성 착취 영상을 제공한 한국인 다크웹 운영자를 미국에서 소환하려 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현지였으면 종신형도 받았을 중범죄인데 한국에선 고작 1년6개월에 그쳐 형기 만료를 앞두고 있기 때문이란 지적이 나왔다. 그나마도 1심에선 집유였다,  
 
이쯤 되면 몰카와 ‘일베’, 소라넷, n번방 등으로 이어진 디지털 성범죄의 진화가 ‘어떻게’ 가능했는지에 대한 물음은 필요 없어 보인다. 카메라등이용촬영죄나 아동·청소년 성착취 영상물 제작 등의 디지털 성범죄자들 중 재판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은 비율은 20%를 넘긴 적이 없다. 대부분 300만원 이하 벌금형에 그쳤다. 절반 이상은 아예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박사들이 웃고 있을 이유다. 
 
디지털 성범죄라는 용어 앞에 붙은 ‘디지털’은 ‘범죄의 가중’을 의미한다. 사진이나 영상에 담기 직전 동의 없는 촬영 또는 은밀히 훔쳐봄이나 협박, 물리적 행위 등 어떤 형태로의 성범죄가 일어났고, 이것이 유포되면서 가해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때문이다. 범죄의 성격과 가해자의 범위를 제대로 정립하고 경각심을 주기에 충분한 입법과 처벌기준이 긴요하다. 
 
마침 대법원에서 디지털 성범죄 양형기준을 논의 중이다. 앞서 검거된 또 다른 n번방 운영자에게 검찰이 징역 3년6개월을 구형한 데 대한 비판이 쇄도하고 있다. 시민사회는 경종을 울릴 정도의 적절한 처벌을 통한 사회 변화를 촉구하는 모습이다. 
 
아울러 언론과 인터넷에서 전해지는 조주빈의 ‘평범했던’ 행적처럼, 현실사회에서 평범하게 지내고 있을 (여성단체 추산 중복 포함) 26만명의 가담자들을 신상공개 또는 제대로 처벌해달라며 들끓는 청와대 국민청원 동의가 24일 기준 180만건을 넘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우리는 더 잔혹한 괴물이 된 제 2의 박사를 목도할지 모른다. 
 
최서윤 산업1부 기자 (sabiduria@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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