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기자
(토마토칼럼)한진가를 둘러싼 촌극
2020-02-10 06:00:00 2020-02-10 06:00:00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작고로 그룹 회장이 된 아들. 그룹 경영에서 자신을 배제한 동생에게 감정이 쌓인 누나. 둘 사이에 벌어지는 치열한 경영권 분쟁. 경영권 문제로 언쟁을 벌이다 어머니의 집에서 물리적 소동을 일으키는 아들. 갑자기 태도를 바꿔 본인이 지적한 문제의 장본인과 손잡은 주주. 가족의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아들을 지지하는 어머니.
 
주지하다시피 한진그룹 얘기다. 개성 강한 등장인물과 상식을 뛰어넘으면서 거듭되는 반전. 드라마였다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면서 흥미진진하게 다음을 기대하기에 충분한 스토리다. 보통의 막장 드라마와 같은 흐름이지만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보니 현실감과 몰입감은 더욱 높다.
 
하지만 현실은 흥미보다 불편함이 앞선다.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과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이명희 정석기업 고문 등 한진가의 사람들이 여전히 고 조양호 회장 때부터 지적된 구시대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후진적 지배구조를 비롯해 조 전 부사장의 '땅콩 회항', 조현민 한진칼 전무의 '물컵 갑질', 이 고문의 폭언과 욕설 파문 등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사건은 한진그룹이 개인의 것이고 스스로를 책임이나 의무는 없는 절대 권력자란 착각이 만들어낸 것이다. 성격과 같은 개인의 성향 문제가 아니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조 회장과 조 전 부사장의 타둠, 물리적 소동을 일으킨 조 회장에 대한 이 고문과 조 전무의 지지도 마찬가지다.
 
한진그룹과 경영권이 고 조양호 회장의 소유였다는 생각이 있으니 지분 상속처럼 공평하게 나뉘지 않는 것에 불만이 생기고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 '빼앗기면 안 된다'는 마음이 드는 게 당연하다.
 
선대 때부터 수십 년간 이끌어온 회사에 대한 애착을 나무랄 수 없다. 지분을 보유한 주주로서의 권리 행사도 비판의 대상은 아니다. 그러나 책임감과 반성이 결여된 상태로 욕심만 차리려는 듯한 행동은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이런 모습은 한진을 만들어 국내 굴지의 그룹으로 키우고 수많은 사람의 일터를 마련한 선대의 노력도 인정 대신 폄하 받게 만드는 길이기도 하다.
 
저마다 기준이 다르겠지만 조 회장 일가가 최근 수년간의 부적절한 행위에 대해 진정성 있는 반성을 했다거나 경영 면에서 막중한 책임감을 보여줬다는 데 공감할 사람은 많지 않다.
 
조 전 부사장과 손을 잡은 KCGI에 대해서도 한진가를 바라볼 때와 마찬가지 생각이 든다. 그동안 KCGI는 지배구조와 재무구조 개선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한진그룹을 압박해왔다. KCGI의 문제 제기에는 총수 일가의 부적절한 행위도 있었다. 그 중심에 있던 인물이 조 전 부사장이다.
 
사모펀드에 사회적 가치를 위해 투자자의 이익을 희생하라고 할 수는 없다. KCGI 혼자만의 힘으로 지배구조와 재무구조를 개선하기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었던 것도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처음 등장할 때 내세운 명분이 사라진 것은 분명하다.
 
국내 재벌의 고질적 문제로 지적된 후진적 지배구조를 선진화하는 데 앞장선 행동주의펀드로 기록되기보다 이익을 좇아간 사모펀드로 이름을 남길 가능성이 더 커진 것도 사실이다.
 
지금까지 펼쳐진 한진가를 둘러싼 스토리가 그동안의 불편함을 깨끗이 씻어낼 만큼 아름다운 결말로 이어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조 회장 일가 이외의 한진그룹 구성원들과 한진을 바라보는 이들의 입맛이 덜 씁쓸한 마무리를 바랄 뿐이다. 
 
전보규 기자 jbk8801@etomato.com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

지난 뉴스레터 보기 구독하기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