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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선 양승태 전 대법원장 "공소장은 한편의 소설"
기소 후 석달만에 첫 재판, 함께 기소된 대법관들도 모두 혐의 부인
2019-05-29 16:56:19 2019-05-29 16:56:19
[뉴스토마토 최서윤 기자]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로 기소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9일 첫 재판에서 자신의 공소장에 대해 법률가가 쓴 법률문서라기 보단 소설가가 미숙한 법률자문을 받아 한편의 소설을 쓴 것이라고 생각될 정도라며 작심 비판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5(재판장 박남천)는 이날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로 기소된 양 전 원장과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에 대한 1회 공판기일을 열었다. 지난 3~4월에 걸쳐 진행한 4차례의 공판준비기일과 달리 피고인의 출석의무가 있는 만큼 이날 법정엔 세 명의 피고인이 모두 출석했다. 특히 구속 상태에서 지난 226일 보석 심문기일 이후 약 3개월 만에 법정에 나온 양 전 원장은 짙은 남색 정장을 입었지만, 넥타이를 단정히 맨 두 전 대법관들과 달리 노타이 차림이었다.
 
검찰 수사는 수사아닌 사찰’”
 
양 전 원장은 오전 재판 중 검찰의 공소사실 진술 직후 모두진술에서 그 모든 건 근거가 없는 것이고 어떤 건 픽션 같은 얘기라고 한 차례 반박한 뒤, 오후 재판에서 변호인 의견 진술 후 보충의견 진술 기회를 얻어 최근 도를 넘은 공격에 대해 이런 마음 하나로 견뎌왔다며 그간의 심경을 쏟아내듯 긴 발언을 이어갔다.
 
양 전 원장은 무려 80명이 넘는 검사가 동원돼 8개월이 넘는 수사 끝에 300몇 페이지가 넘는 공소장을 창작했다법관 생활을 42년 했지만 이런 공소장은 처음 봤다. 동료 법률가들도 어떻게 이런 공소장이 다 있냐는 말을 한결같이 말한다고 운을 뗐다. 그러면서 정말 검사의 조서가, 우리가 조심해서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교묘한 질문을 통해 전혀 답변과 다른 내용으로 기재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고 비판했다.
 
양 전 원장은 자신에 대한 검찰 수사는 수사가 아닌 사찰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취임 초기부터 퇴임까지 모든 걸 들춰내 이 정도는 문제 삼을 수 있겠다하는 게 공소장이라면서 그런 사찰을 법원을 향해 한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삼권분립을 기초로 하는 민주정을 채택한 나라에서 법원에 대해 이토록 잔인한 수사를 한 사례가 어디 또 있는지 듣고 싶다고 토로했다.
 
이날 검찰은 양 전 원장 재임 시절 대법원과 법원행정처가 상고법원 도입 등 대법원 위상 제고를 목적으로 강제징용 손해배상 사건과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등 청와대 관심 재판 정보를 청와대와 교류하고 선고결과에 개입한 정황, 상고법원 도입을 반대하는 법관들인 국제인권법연구회와 그 소모임 인사모에 대한 물의야기 법관 리스트작성과 탄압 정황, 공보관실 운영비 불법 편성 및 집행 등 약 한 시간에 걸쳐 피고인들에 대한 공소사실과 죄목 등을 진술했다.
 
이에 양 전 원장의 변호인은 공소장 일본주의 위반·공소사실상 공모관계 불명확성·죄수불명확성을 들어 공소장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별 공소사실에 대해 별로 팩트가 없다며 조목조목 반박한 뒤, “이 사건 공소제기는 주위적으론 공소제기 절차가 위법 무효여서 당장 공소기각 판결을 내려달라는 게 저희 생각이다. 예비적으로 보더라도 범죄가 되지 않거나 범죄사실 증명이 없는 것으로 무죄를 선고하는 게 맞단 의견이라고 말했다.
 
검찰 vs. 대법관들 신경전
 
검찰과 변호인은 법정에서 모두진술과 서증조사의 내용 및 순서를 두고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검찰은 당초 증거조사의 첫 순서로 피의자 신문조서를 다루려 했지만, 변호인들이 이를 마지막에 다뤄달라고 요청해 재판부가 이를 받아들였다. 검찰은 유죄 입증책임을 부담하는 검찰 의견이 반영될 걸로 이해했기에 업무계획을 짰다면서 당황한 기색을 보인 후 재판장 지휘에 따르겠다며 조사 순서를 조정했다.
 
또 검찰이 모두진술에서 공소사실을 구체적으로 낭독하며 증거를 표시하자 양 전 원장의 변호인이 형사소송법 규정을 들며 이의를 제기했다. 이를 재판부가 받아들이자, 검찰은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변호인에게도 마찬가지로 공소사실 인부 등 형사소송법에 규정된 부분만 주장할 수 있도록 지휘해주시길 바란다며 날을 세웠다. 검찰은, 양 전 원장의 변호인이 피고인 측 모두진술을 변호인이 먼저 하겠다고 말하자, 검찰은 형사소송법상 검찰의 모두진술이 끝나면 피고인이 모두진술을 한다. 규정대로 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이에 재판은 피고인들의 모두진술, 변호인의 의견 진술에 이어 다시 피고인들이 보충의견을 진술하는 방식으로 효율성보다는 다소 원리원칙에 따라 진행되는 모습을 보였다.
 
변호인과 양 전 원장이 한 시간 가량 검찰의 공소사실을 비판하자, 검찰은 반박할 기회를 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고, 양 전 원장 역시 반박할 기회를 주신다면 저도 다시 반박할 기회를 주시기 바란다며 대립하기도 했다.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들과 변호인 역시 같은 취지로 검찰의 공소장을 비판하고 공소사실을 모두 부인했다.
 
재판부는 오는 31일과 내달 5일 오전·오후 내내 각각 2, 3회 공판기일을 열고 검찰의 서증조사와 이에 대한 변호인 의견을 계속 청취할 예정이다.
 
 
양승태(왼쪽부터)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고영한 전 대법관이 29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사법행정권 남용' 관련 1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최서윤 기자 sabiduria@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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