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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의세상읽기)파차마마
2018-10-15 06:00:00 2018-10-15 06:00:00
'척박(瘠薄)하다!' 지난 한 달 동안 내 눈앞에 일관되게 펼쳐진 풍경에 대한 가장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에콰도르, 페루, 칠레 북부를 다녀온 것. 적도와 남회귀선(남위 23.4도) 사이의 페루해류와 안데스산맥에 사이에 놓인 척박한 땅이었다. 과연 이런 곳에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싶었다. 
 
물론 단 한 달 동안 세 나라를 두루 살펴볼 수는 없었다. 단지 에콰도르 갈라파고스 제도의 특이한 동물군, 페루의 쿠스코를 중심으로 한 잉카유적, 그리고 칠레 북부의 아타카마 사막의 특이한 지형을 살펴보았을 뿐이다. 화려한 동물군과 신비로운 고대문화 그리고 화산과 간헐천의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하면서도 척박하다는 인상은 결코 버릴 수 없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악마의 소굴이라고 하면 딱 맞을 해안을 이루고 있는, 암울하기 그지없는 부서진 검은 용암더미 땅에 상륙했다." 찰스 다윈이 승선한 '비글호'의 선장 피츠로이는 갈라파고스 제도의 채텀 섬에 상륙한 날 이렇게 기록했다. 다윈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리가 지옥 중에서 조금 나은 부분을 상상하면 떠오르는 모습과 비슷했다."
 
갈라파고스 제도는 비교적 최근에 발생한 화산폭발로 만들어진 섬이다. 당연히 고생대나 중생대의 화석 따위는 존재하지 않고 극히 최근에 발생한 생물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아무리 척박한 곳이라도 생명은 적응해서 살아간다. 그게 바로 진화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갈라파고스는 해적의 은신처였다가 포경선의 휴식처였고 나중에는 수용소 군도였다. 생명다양성은 급격히 파괴됐다. 하지만 이것은 옛날이야기다. 이구아나와 바다사자 그리고 펠리컨은 사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멸종위기에 빠졌던 거대육지거북은 사람들에 의해 서서히 복원되고 있다. 여전히 땅은 척박하지만 다양하고 신기한 생명이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사람들과 어울려서 말이다. 
 
가장 충격적인 곳은 페루의 잉카유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꿈의 여행지로 꼽고 있는 마추픽추는 예외적인 곳이다. 마추픽추는 잉카제국 왕족의 건기 휴가지였다. 해발 2500미터 이하의 낮은 곳이고 푸른색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곳이다. 밀림으로 감춰진 덕분에 스페인군의 침략을 받지 않았다. 잉카제국의 수도 쿠스코는 해발 3500미터의 척박한 곳에 자리한다. 12각 돌을 비롯한 다양한 모양의 거대한 돌을 치밀하게 쌓아올린 성벽이 놀랍다. 
 
스페인군은 잉카문명을 무너뜨리고 그 위에 유럽식 건축물을 쌓아 올렸다. 아래쪽의 잉카문명 유적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위쪽에 쌓은 유럽식 건물은 대부분 최근에 다시 지은 것이다. 지진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페루에서 만난 가이드들은 대부분 메스티소다. 메스티소란 스페인계 유럽인과 아메리카 토착민의 혼혈인을 말한다. 궁금했다. 메스티소들은 어떤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더 클까? 스페인? 아니면 잉카? 기본적으로 잉카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컸다. 스페인인들이 모든 것을 다 망쳐놓았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하지만 쿠스코에서 만난 마지막 가이드 디에고의 생각은 달랐다. 스페인 문화에 대한 존경심을 놓치지 않았다. 쿠스코에서 볼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스페인의 것이라고 했다. 잉카 문명에 대한 자부심은 당연히 컸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잉카 문화가 아니라 케추아 문화를 보라고 했다. 
 
잉카란 태양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태양신을 섬기는 왕족, 특별한 족속이라는 말이다. 쿠스코에서 보이는 것들이 모두 잉카 문명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대부분은 케추아어를 사용하는 민중의 작품이라는 것이다(쿠스코에서는 요즘 학교에서 다시 케추아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디에고는 가톨릭에서 파차마마로 개종했다. 파차마마는 '땅의 엄마'라는 뜻이다. 잉카 제국의 왕족들은 태양신을 섬겼지만 민중들은 땅의 엄마를 섬겼다. 땅에서 스페인, 잉카, 케추아 그리고 동식물과 바람과 비가 모두 나왔다. 파차마마를 믿는다는 것은 자연과 인류를 사랑하는 뜻이라고 했다. 파차마마를 믿는 사람은 어떤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냐고 물었다. "땅과 자연을 지킵니다. 지구온난화를 막는 게 지금은 가장 큰 일입니다."
 
칠레의 아타카마 사막 투어 동안 내내 함께 한 순수한 스페인계 가이드인 크리스티안도 파차마마 신도였다. 그도 지구 온난화를 걱정했다. 그가 사막에 살면서 가이드를 하는 이유는 우리처럼 기름진 땅에서 온 사람들에게 척박한 지구의 아름다움을 깨우쳐주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아무리 척박한 곳이라고 해도 생명이 산다. 생명이 있는 모든 곳은 아름답다. 파차마마!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penguin1004@m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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