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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의세상읽기)299,792,458
2018-09-28 06:00:00 2018-09-28 06:00:00
사람은 가만히 보면 참 딱한 동물이다. 사자처럼 강한 턱과 이빨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독수리의 날카로운 부리나 발톱도 없다. 하마나 코끼리처럼 덩치가 크지도 않고 곰처럼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털가죽도 없다. 게다가 느려 터졌다. 하지만 사람은 결코 만만한 동물이 아니다.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 같은 감각이 골고루 뛰어난 거의 유일한 동물이다. 뛰어난 감각은 생존에 유리하다. 덕분에 우리는 보잘 것 없는 육체에도 불구하고 지구의 지배자 구실을 하고 있다.
 
하지만 최첨단 기술을 사용하는 현대인은 뛰어난 감각 때문에 자주 성가신 상황에 놓이게 된다. 현미경과 망원경이 있는데 시력은 너무 좋고, 포장지에 성분과 유통기한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음식을 먹는데 미각은 불필요하게 섬세하다. 무엇보다 전화기로 지구 반대편과 실시간으로 통화할 수 있는데 우리의 청력은 너무 좋아 탈이다.
 
나는 꽤나 무던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버스, 전철, 기차 같은 대중 교통수단을 이용할 때마다 괴롭다. 소음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왁자지껄 대화하는 무궁화호 열차보다 대부분의 승객이 침묵하고 있는 KTX 열차에서 더 힘들다. 전화 통화의 대화내용이 고스란히 들리기 때문이다. 짜증을 견디지 못하고 페이스북에 "KTX OOO 열차 9번 칸 10D 좌석 아저씨 때문에 피곤해 죽겠다"란 글을 올리곤 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달리는 기차 속에서 전화 통화가 가능하다는 게 상식을 뛰어넘는 일이다. 예의범절을 따지는 게 아니다. 물리학적으로 불가능할 것 같다는 말이다. 말을 주고받는 대화를 공을 주고받는 게임으로 바꿔서 생각해 보자. 
 
10미터 떨어진 사람에게 초속 10미터의 속력으로 공을 던지면 1초면 도달한다. 이번에는 초속 10미터로 상대방을 향해 움직이는 트럭 위에서 같은 속력으로 공을 던지면 어떻게 될까? 공의 속력은 트럭의 속력과 합쳐져서 초속 20미터가 되고 상대방에게 0.5초면 도달한다. 같은 속력으로 상대방으로부터 멀어지는 트럭에서 공을 던졌다면 공은 영원히 상대방에게 도달하지 못한다. 공의 속력은 10-10=0이 되기 때문이다. 
 
공을 전화 통화로 바꿔보자.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만 움직이고 있어도 정상적인 대화를 하지 못하게 된다. 전파가 빨리 도착하기도 하고 전파가 영원히 도착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KTX  열차 안에서 전화 통화를 하고 있다. 어떻게 달리는 기차에서 전화통과가 가능할까?
 
빛은 우주에서 가장 빠른 존재이기 때문이다. 빛은 1초에 지구를 일곱바퀴 반을 돌 수 있고, 1.2초면 달에 도착하며, 8분20초면 태양에 도착한다. 대략 반나절이면 명왕성에도 도달한다. 빛은 정말 빠르다. 사람들은 뭐든지 재고 싶어 한다. 이미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도 빛의 속도를 측정하고 싶은 욕망에 빠졌다. 17세기부터는 제법 똘똘한 측정방법이 제시되더니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빛의 속력을 꽤 정확하게 측정하는 실험이 생겨났다. 마침내 우리는 빛의 속도가 초속 2억 9979만 2458미터라고 100% 정확히 알게 되었다. 
 
100퍼센트 정확도라니…. 어떻게 측정했기에 정확하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또 어떻게 빛의 속력이 소수점도 없이 정수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빛의 속도는 측정한 값이 아니라 우리가 정한 값이기 때문이다. 1983년 국제도량형총회(CGPM)는 빛이 진공에서 2억 9979만 2458분의 1초 동안 움직인 거리를 1미터라고 정의했다. 이 정의에 따르면 빛은 진공 속에서 1초 동안 2억 9979만 2458미터를 움직일 수밖에 없다. 빛의 속력을 간단히 c라고 하자.
 
빛의 속력은 언제나 일정하다. 왜? 가장 빠른 존재이기 때문이다. 원래 가장 빨랐던 것이 더 빨라질 수는 없는 것이다. 시속 300킬로미터로 달리는 기차에서 쏜 광선이라고 해서 빛의 속도에 기차의 속력을 더해서 ‘c + 300’이 되지는 않는다. 빛은 가장 빠른 존재라서 그 속력은 언제나 일정하다. 이게 바로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이 말하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서 우리의 불행이 시작되었다. KTX가 얼마나 빨리 달리든, 어느 방향으로 달리든 전파의 속력은 달라지지 않고 휴대폰 통화는 가능하다. 하여 우리는 KTX에서도 성가신 통화내용을 다 들어야 한다. 방법은 하나다. KTX 안내 방송에 따라서 통화는 객실 바깥에서 하면 된다. 기억하자. 빛의 속도는 초속 2억 9979만 2458미터로 일정하다.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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