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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과 남북경협)“소련 방문, 사회주의 국가들과 평화 마련 위함”
(4)일기 형식으로 쓴 소련 방문 7일 비망록
2018-08-11 06:00:00 2018-08-11 06:00:00
[뉴스토마토 채명석 기자] 1989년 1월6일부터 12일까지 7일간 국내 대기업인으로는 최초로 소련을 방문한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한 달 후인 2월 7일 방소 일정을 일기 형식으로 자신이 직접 작성한 비망록을 공개했다.
 
김포공항 출발 순간부터 모스크바를 떠날 때까지 틈틈이 시간을 내 쓴 비망록은 아산의 생활철학과 신념, 정치 및 경제, 사회문제에 대한 생각을 솔직하게 밝히고 있어 대기업가로서의 인간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자필로 쓴 소련 방문 비망록. 1989년 2월 7일자 동아일보 7면에  사진이 실렸다. 사진/동아일보
 
아산은 소련 방문이 한·소간 정치, 외교, 경제 관계의 신뢰를 구축하고 사회주의 국가들과 평화를 견고히 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모스크바에 처음 도착, 일본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서 세계 어느 곳에서나 먼저 이익을 찾아 선점한 일본에 대해 “슬픔을 금치 못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시베리아 개발과 관련해서는 “시베리아를 새로운 천지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나는 갖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여생을 시베리아 개발 전부 만을 위할 수는 없다”고 기록, 사업구상까지도 드러냈다.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제정 러시아 황제들의 사치스러웠던 생활을 목격한 뒤에는 “국민의 피를 짜내 호화 장엄한 사치의 극치를 이루었으니 혁명은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제왕이 혁명을 자초한 것”이라고 기록했다.
 
다음은 당시 언론이 내용을 요약해 보도한 비망록 내용이다.
 
1989년 1월6일: 평화체제 구축 위해 소련 방문
한국 서울을 출발하여 ‘모스크바’로 향하기 위해 김포공항에 도착하였다. 공항에는 TV카메라맨을 위시하여 내외기자들 50명이 벌써 와 진을 치고 나를 기다렸다. 나는 한국과 소련의 경제교류 등 여러 문제를 협의하고 경제 외교 정치통로의 신뢰를 굳건히 하며 사회주의 체제 국가들과 평화를 견고히 하는데 소련 방문의 주요한 의의를 가지고 출발한다. 미래는 긍정적으로 전망하고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자에 의해 개척되어 나가는 것이다. 신은 항상 성실하고 근면하며 창의적인 인간의 편에 서서 축복한다는 것을 굳게 믿고 쉴새없이 전진을 계속해야 한다.
 
1월7일: “이익 있는 곳엔 일본 있다” 실감
나리타에서 모스크바행 소련 비행기의 탑승수속을 마쳤다. 오후 1시에 소련 비행기는 도쿄 나리타공항 활주로를 떠났다. 고공으로 비행하는 도중 식사 서비스를 받았다. 식사는 생각보다 좋았다. 모스크바 현지시간으로 6시 반쯤 모스크바 비행장 활주로에 비행기가 안착했다. 현지 초청 인사들과 우리 회사 선발대 임원들의 영업을 받아 45분가량 겨울 북극도시의 눈길을 달려 모스크바 최고의 호텔에 안내 받았다. 우리 일행은 장거리 여장을 풀고 소련활동 일정을 초청 인사들과 협의한 후 저녁식사를 호텔 내 일식당에서 함께 했다.
 
세계의 가는 곳마다 일본인들이 재빨리 크고 작은 모든 이점을 차지하고 있어 나를 슬프게 하였다. 우리 일행은 쉴 사이도 없었다. 식사를 마친 후 곧 ‘레닌그라드’행 밤 열차를 타기 위해 모스크바 기차 정거장으로 갔다. 모스크바 밤 11시 기차는 우리 일행을 싣고 서북으로 서북으로 레닌그라드행 북극의 밤을 달렸다 8시간 후에야 레닌그라드 플랫폼에 도착한다고 한다. 기차는 침대차여서 다행스러웠다. 밤 11시20분에 야간열차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1월8일: 제정 러시아, 사치로 혁명 자초
새벽 2시에 기차가 덜컥거리며 흔들리는 바람에 잠이 깨 다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기차 실내등으로는 작은 글씨의 책을 보기에는 알맞지 않다. 나는 흔들리는 차중에 엉망의 글씨로 일기를 쓰며 지루한 시간을 소모하고 있다. 어제 장거리 비행으로 너무 피로하여 식사를 하는둥 마는둥 하였더니 배가 대단히 고프다. 차안에는 물 한모금 마실 것도 준비돼 있지 않다. 서울집의 사과, 배 등이 눈에 선하도록 먹고 싶다. ‘시베리아’를 새로운 천지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도 하고 공상도 계속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나의 여생이 시베리아 개발이 전부일 수는 없다고도 생각했다. 여러가지 생각을 되새기면서 레닌그라드 도착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밖에는 백설이 산야에 가득 쌓여있어 한국에서 눈이 제일 많이 오는 통천 고향생각을 하게되어 행복하다.
 
기차는 새벽 7시에 레닌그라드에 도착하였다. 우리 일행 3인은 하루 종일 완전히 관광으로 소일했다. 제정 ‘러시아’ 시대의 호화왕국을 수리해 박물관으로 개조한 역사적인 곳들이었다. 제정 러시아 시대 제왕들의 호화찬란하였던 공사의 생활을 엿볼 수 있었다. 나는 과거 ‘프랑스’ 여행 중에 ‘베르사유’ 궁전을 관광하면서 제왕의 장엄한 호화 생활이 프랑스의 혁명을 자초하였다고 느꼈던 것을 레닌그라드의 하궁 박물관과 동궁 미술관을 관광하면서 제정 러시아 혁명의 필연성을 실감했다. 국민의 고혈을 짜내 호화 장엄한 사치의 극을 이루었으니 혁명은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제왕이 자초한 것이었다.
 
1월9일: “내 생활에 획기적인 해, 최선 다짐”
새벽3시에 기상했다. 1989년은 나에게는 대단히 큰 변화가 전개될 듯하다. 1월중에 소련 방문, 1월23일 북한방문 등 내 생활에 획기적인 해가 될듯하다. 나는 홀로 레닌그라드 객사에서 새벽3시에 기상하여 여러가지 사색에 잠겼다. 어떤 운명이 전개될는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모든 생애의 경험과 지혜를 기울여 최선을 다한다.
 
1월10일: 공산주의 젖은 소련 관료, 경쟁사회 실감 못해
9일 밤 11시45분에 레닌그라드에서 모스크바행 침대 열차에 올랐다. 열차는 8시에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오전 10시30분 소련 연방정부 모스크바 상공회의소 주최 회의에 참석해 시베리아 개발 타당성과 저가전력 문제, 저가로 전력이 개발된다면 그 전력을 각종 많은 전력을 소모하는 산업 생산의 타당성 문제(전기제철소 알루미늄공장 펄프공장 등), 연해주 중심의 여러가지 산업 문제와 임산물 중심의 제재소, 가구공장 등 석유가스, 석탄의 저가생산품으로 산업 전력이 싸게 공급될 수 있는 지 타당성 검토를 할 생각으로 관련 부서장들을 종일 예방하면서 상담하였다. 이 나라 경제관련 부서장들은 70년간 공산주의 생산방식으로 일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생산제품이 국제경제사회에서 경쟁적이라는 생각이 너무도 실감을 못하는 듯했다.
(자료: 1989년 2월 7일자 동아일보·경향신문)
 
채명석 기자 oricms@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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