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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만인보로 보는 일상사-10화)도시락 변천사
“그 도시락 뚝딱 까먹고”
2018-08-13 08:00:00 2018-08-13 09:57:21
지난 4월 코트라(KOTRA) 하노이 무역관이 베트남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회사에서 식사를 제공받지 못하는 직장인의 절반 가까이가 집에서 도시락을 싸오고 나머지는 회사 인근에서 점심만 파는 작은 식당인 ‘껌디어(접시밥)’, ‘껌빙전(서민밥)’집을 이용하거나 온라인 주문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한다고 한다. 이들이 도시락을 직접 준비하는 이유는 ‘비용 절감’보다 ‘외부 음식의 식품 위생 안전에 대한 우려’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베트남의 도시락문화와 도시락시장의 발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니 흥미로운 일이다.
 
 
 
역사 속 도시락 이야기
한반도에 국한시켜 도시락의 유래를 말할 때 흔히 언급되는 것이 공고상(公故床) 또는 번상(番床)이다. 그 출현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품이 19세기 조선의 것인 점을 볼 때 최소한 조선시대에 상용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고관이 궁중이나 관청에서 번(番)을 설 때 집의 상노(床奴)들이 상에 음식을 담아 머리에 이고 날랐다고 하는데, 이것이 공고상 또는 번상이다. 풍혈상(風穴床)이라고도 불리는 이 밥상의 형태는 8각 또는 12각으로 상다리는 원통형이고, 머리에 이고 나르기 편하도록 하단을 길게 만들었으며, 이동할 때 앞을 내다보기 위해 큰 구멍을 뚫어놓았다. 또한 양 측면에는 ‘아(亞)’자로 투각을 새겨 손잡이로 사용했다.
 
역사 속 도시락과 관련해 떠오르는 한 이미지를 꼽는다면 아마도 윤봉길(1908∼1932) 의사의 도시락 폭탄일 것이다. 1932년 4월29일 상하이 훙커우 공원(현 루쉰 공원)에서 일본 천황의 생일기념식과 상하이 점령 전승기념식이 열렸을 때 윤봉길 의사가 투척한 폭탄은 도시락과 물통으로 위장한 두 개의 폭탄들 중 물통 폭탄이었다. 도시락 폭탄을 투척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윤봉길 의사는 경성지방검찰청의 신문 조서(1932년 5월4~18일 사이 총 7회에 걸쳐 행해진 신문 내용을 요약해 5월19일에 작성한 것)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29일 아침 자동차를 타고 신공원(훙커우 공원)으로 가는 도중, 자동차 안에서 손가락으로 보자기를 찢어서 구멍을 뚫었다. 구멍을 뚫은 것은, 폭탄을 보자기에 싼 채로 던지려고 폭탄의 발화용 끈을 당기기 위해서였다. 상황을 보니 도저히 2개를 던질 여유가 없었다. 물통 모양 폭탄에 끈이 있어서 던지기 쉽다고 생각하여, 도시락 상자 폭탄은 땅 위에 내려놓고 물통 모양의 폭탄을 던진 것이다.” 일각에서는 물통 폭탄은 투척용, 도시락 폭탄은 자결용이라는 해석이 있어왔지만, 이 조서의 내용상 2개의 폭탄이 다 투척용이었고 윤봉길 의사가 도시락 폭탄을 선택하지 않은 것은 단지 발화용 끈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윤봉길(1908~1932) 의사. 사진/뉴시스
 
도시락의 추억
이동식 밥상인 공고상은 세월에 따라 찬합, 고리짝, 양은도시락 같은 후속 형태로 계승되었다. 사기나 목제찬합은 여러 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원래 2층으로 된 대나무찬합은 밥과 반찬을 따로 담기 위한 것이었다. 고리짝은 고리버들이나 대오리를 길고 둥글게 엮어 만든 도시락으로 이제는 보기 힘든 유물이 되었다. 양은도시락은 70~80년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닌 세대들에게 학창시절 추억의 한 자락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보온병 도시락이 나오기 전까지 양은도시락은 겨울철 교실 석탄난로 위에 수십 개가 층층이 쌓여 독특한 장면을 완성했던, 한 시절의 일상문화를 대변하는 아이콘이었다. 제일 아래에 깔린 도시락들은 타서 밥이 눌어붙고 제일 위에 있는 도시락들은 여전히 차갑기 때문에 틈틈이 도시락 층을 바꾸어 주던 시절, 삼삼오오 모여 앉아 도시락을 함께 먹을 때 드러나는 도시락 반찬들은―가정형편상 아예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경우는 물론이거니와―빈부격차를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했다. 시대적 배경이 해방 전후~한국 전쟁 발발 전인 <만인보>의 한 시는 “도시락에 삶은 달걀 환하게 들어 있”고 “흰쌀밥에 보리 뿌려졌”던 친구의 도시락을 묘사하고 있는데(‘봉태’, 2권), 1950~60년대 도시락에서 주를 이룬 것이 꽁보리밥, 감자, 옥수수 등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도시락이었던 셈이다.
 
양은도시락을 열었을 때 달걀 프라이가 밥 중앙에 있고 소시지 반찬이 있으면 꽤 괜찮은 도시락이었다. 반찬 ‘나눠먹기’ 내지 ‘뺏어먹기’가 교실의 한 일상풍경이던 시절, 성장기 중이라 수시로 배고픈 청소년들이 2교시나 3교시가 끝나면 도시락을 이미 비워 다음 수업시간에 들어오는 교사가 인상을 찌푸리고 창문을 열게 하던 시절, 때로는 수업 중에 도시락을 몰래 먹는 스릴을 즐기는 학생들도 있던 시절, 야간자율학습 전에 먹을 도시락까지 도시락 두 개를 싸가지고 다니던 시절, 도시락 세대의 기억 속에 남아있음직한 그림들이다. 그보다 훨씬 전의 한 시절, 수업을 ‘땡땡이’ 치고 도시락만 ‘까먹는’ 한 소년의 모습은 시대가 달라도 그리 낯설지 않다.
 
진자 오빠는 여드름만 잔뜩 나서
학교 공부 죽어도 싫어
도시락 싸주면
다리 밑에 가 놀다가
그 도시락 뚝딱 까먹고
한잠 늘어지게 자고 나서
옷에 묻은 검불 털고
학교 간 아이들 돌아올 무렵이면
슬슬 두 다리 놀리기 시작한다
천하 한량 따로 있나
집에 가면
장독대 항아리 행주질하는
바지런한 진자 어머니 반색하여
이제 오니
오늘은 뭘 배웠니
일본말 몇마디나 배웠니
예 다섯 마디 배웠어
어디 외워보아라
한동안 난감해하다가
밥은 벤또
선생은 센세이
학생은 가꾸세이
토끼는 우사기
나팔꽃은 아사가오
오냐 내 새끼야
제 아비 재조 물려받아 하늘이 내렸지
< … >
(‘진자 오빠’, 5권)
 
광주 동구 금남로의 '추억의 7080 충장축제'에 1970년대 국민학교 양철 도시락이 재현된 모습. 사진/뉴시스
 
한국전쟁 이후 쌀이 부족했던 1950년대에는 잡곡 혼식이 적극 장려되었다. 1951년 국무회의에서는 절미운동의 일환으로 미곡을 원료로 하는 제과, 떡, 엿의 제조를 금지하기도 했다. 혼식 장려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도 계속되었다. 이 시기에는 특히 미국산 밀이 대량으로 들어왔는데, 당시 미국이 수출 시장 개척을 위해 원조 형식으로 자신의 잉여농산물인 밀을 무상 공급한 것이다.
 
이렇게 계속된 ‘혼·분식 장려운동’은 유신시기에 들어서 강제적으로 진행되었고 그 대표적인 방식이 학교에서의 도시락 검사였다. 도시락에 30% 이상의 혼식이 되어 있지 않으면 학생들이 도시락을 먹지 못하게 하는 식으로 강제해, 보리 알갱이를 세거나 도시락 밑바닥에 몰래 깔은 흰 쌀밥을 찾아내기 위해 밥을 헤집는 등 우스운 일화들이 벌어진 것도 이때이다. 심지어 혼·분식 도시락을 싸오지 않으면 부모를 부르거나 도덕과목 점수에 벌점을 주는 경우도 있었다.
 
‘재건국민운동본부’ 산하 ‘식생활개선추진위원회’에서 담당했던 이 ‘혼·분식 장려운동’은 여러 해를 지나면서 우리 국민의 식생활을 바꿔놓게 된다. 당시 농수산부가 정한 ‘혼·분식의 날’인 수요일과 토요일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음식점에서 쌀로 만든 음식을 팔지 못하게 했다. 1963년 한국에 처음 등장한 라면이 오늘날 우리 국민의 대표적인 간편식이 된 것도 이 시기의 분식장려운동과 무관하지 않다고 하겠다.
 
급식세대의 도시락
1977년 쌀 자급자족을 달성하면서 혼·분식 관련 행정명령과 장려운동도 사라지게 된다. 1980~90년대를 거치면서 줄어든 쌀 소비는 이제 걱정할 정도에 이르렀으니 혼식 강제를 위한 도시락 검사는 오래된 전설로 남았다. 80년대에는 플라스틱 도시락이 등장했고 나아가 새롭게 출현한 보온병 도시락 덕분에 따뜻한 국까지 도시락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학교급식이 전면적으로 실시된 90년대 후반에 이르러 도시락은 학교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반면, 급식세대에게 새로운 도시락문화가 나타났으니 그 첫째가 ‘추억의 도시락’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양은도시락 체험’이다. 영화나 TV드라마를 통해 접한 70~80년대 문화에 대한 호기심은 부모님 시대의 교복을 빌려주는 가게를 방문하고 양은도시락을 흔들어 먹는 식당을 찾아 그 시절의 ‘추억’을 ‘체험’하는 새로운 문화콘텐츠로 발전한 것이다.
 
학교급식 세대가 애용하는 대표적인 도시락은 편의점 도시락이다. 학교도시락 세대보다 더 경쟁에 쫓기며 살아온 20~30대의 이 젊은이들은 학생으로, 취업준비생으로, 편의점 도시락을 찾거나 학원가 컵밥으로 한 끼를 때우는데 익숙하다. 물론 편의점 도시락의 발전과 더불어, 최근에는 젊은 층의 일본여행이 활발해지면서 일본식 도시락(‘벤또’)이 유행하고 소풍·야유회용 도시락, 여행용 도시락 등 다양하게 상품화된 도시락이 끊임없이 진화해가고 있다. 도시락 전문업체들이 생겨나고 도시락시장이 확대되는 양상은 오늘날의 도시락문화를 특징짓고 예전의 도시락문화로부터 구분되게 하는 결정적 차이일 것이다.
 
서울 동작구 노량진 학원가에서 공무원 시험 준비생들이 컵밥을 먹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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