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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의세상읽기)영미, 영미, 영미
2018-02-23 06:00:00 2018-02-23 13:23:50
스포츠 광팬으로서 이번 평창 겨울 올림픽에서 참신한 경험을 하고 있다. 언제나 사람들에게 각종 스포츠 종목의 규칙과 원리, 그리고 강팀과 명선수의 대한 정보를 제공하던 나도 이번에야 처음으로 규칙과 전략을 깨달은 종목이 있다. 컬링이 바로 그것.
 
평창 올림픽이 열리기 전까지는 우리에게 컬링은 겨울 올림픽 중계 때 잠깐 스쳐가는 종목이었다. 나는 물론이고 방송사 중계 팀도 결과만 알려줄 뿐 어떤 방식으로 게임을 하는지 제대로 설명한 적이 없다. 1998년 나가노 올림픽 때 정식 정목으로 채택되었지만 우리나라는 2014년 소치 올림픽 때야 처음 참가했다고 하니 그럴 만도 하다. 예전에는 그저 알까기 정도로만 이해했다. 하우스 안에 있는 버튼에 최대한 가까이 스톤을 가져다 놓으면 이기는 단순한 게임이고, 따라서 나중에 던지는 팀이 유리하고 한 번 실수하면 질 가능성이 큰 시시한 게임이었다. 이번에야 컬링은 알까기가 아니라 오히려 체스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컬링은 이번 겨울 올림픽 때 우리나라에서 최고 인기종목이 되었다. 그 이유는 물론 우리나라 여자팀이 조 1위로 당당히 준결승에 진출할 정도로 승승장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안다. 컬링 여자 대표 팀에는 스토리가 있다. 다섯 명 가운데 주전 네 명은 주장 역할을 하는 스킵 김은정이 가장 많이 외치는 '영미'를 기준으로 엮여 있는 지역민이다. 김은정은 김영미 친구이고 김경애는 김영미 친동생이며 김선영은 김영미 동생의 친구다. 그러니 팀워크가 잘 맞을 수밖에(알고 보니 다른 나라 팀도 비슷한 경우가 많았다. 컬링은 개인을 국가대표로 선발하지 않고 팀을 국가대표로 선발한다).
 
나는 축구를 좋아한다. 축구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눈이 두 개뿐이고 눈은 앞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리는 사방에서 들려온다.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과 크기와 속도에 따라 내가 누구에게 어떤 공을 줘야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래서 "저 팀은 축구를 입으로 하나봐. 시끄러워서 혼났어!"라는 힐난을 받을 정도로 말이 많은 팀이 팀워크가 좋은 팀이다. 배구나 조정도 마찬가지다. 모든 운동은 원래 입으로 하는 거다.
 
컬링도 마찬가지다. 정작 필요한 기술이라는 것은 스톤을 밀고 빗질을 해서 길을 내는 것뿐이다. 별다른 재주가 아니다. 그런데 선수들은 스톤을 밀기도 전에 정말로 많은 말을 한다. 상대팀이 들어도 상관없다. 큰소리로 토론하면서 전략을 세운다. 스톤을 밀어낸 다음에는 집중적으로 고성을 지른다. 스톤이 밀려가는 짧은 시간에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해야 할 이야기는 몇 가지뿐이다.
 
'스윕', '헐', '얍', 그리고 '업'과 '클린'이 거의 전부다. 모두 빗질과 관련된 말이다. 스윕은 빗질을 하라, 헐과 얍은 빗질을 빨리 하라, 업은 빗질을 그만하라, 그리고 클린은 세게 닦지 말고 가볍게 문지르라는 뜻이다. 하긴 이것 말고 뭐가 더 필요하겠는가? 각국이 자기네 나라 말을 쓰기도 하지만 유럽 팀이 쓰는 말이 가장 편해서인지 거의 모든 팀이 같은 용어를 쓰고 있다. 덕분에 관중도 이해하기 편해서 좋다.
 
그런데 우리나라 선수들은 특이한 용어를 사용한다. 영미가 거의 전부다. 하지만 관중들은 현명하다. 영미만 듣고도 무슨 뜻인지 안다. '영미~'는 빗질을 시작하라는 의미고, '영미야!'는 빗질을 더 빨리 하라, '영미야~'는 빗질을 멈추고 기다리라. 그리고 '영미, 영미, 영미~'는 빗질을 더는 할 필요 없다는 뜻이라는 게 관중들의 해석이다. 내가 봐도 맞는 것 같다.
 
평창 겨울 올림픽이 끝난 후 사무실의 풍경을 상상해 본다. 모든 사무실에 영미가 한 명이 등장하게 될 것 같다. 사무실의 영미는 철수일 수도 있고 영수일 수도 있으며 은영이나 경원이일 수도 있다. 아마도 가장 약한 사람이 그 대상이 될 것이다. 영미를 부르는 속도와 횟수, 그리고 크기에 따라 온갖 심부름을 다 시킬 것이다. 당연히 사무실의 영미는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모를 테고 결과적으로 일은 일대로 하면서 핀잔을 들을 것 같아 걱정이다. 우리는 가정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하지 않았는가! '아가'와 '엄마'라는 예쁜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시달림을 받는가.
 
대표 팀의 스킵 김은정 선수가 부르는 '영미'에는 신뢰와 존경이 담겨있다. 그래서 김영미 선수는 영미 소리만 듣고도 스킵의 판단을 믿고 자신 있게 빗질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영미가 아니라 이미 있는 영미들에 대한 신뢰와 존경이다.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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