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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87화)장준하
“돌베개 베고 / 적막했다”
2017-11-13 08:00:00 2017-11-13 14:38:35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8월17일자로 42주기를 맞은 고(故) 장준하 선생의 추모식에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추도사를 보냈다. “평화와 정의, 민주주의를 향한 선생의 의지와 충정은 87년 6월항쟁의 함성으로, 2016년 촛불혁명의 불꽃으로 기어이 다시 살아났”다고 천명한 현 대통령은 그러나 “42년이 흐른 지금도 선생을 우리 곁에서 빼앗아간 죽음의 진상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하고 있”음에 대해 사죄와 부끄러움의 뜻을 전했다. 한편, 장준하 선생 타살 의혹의 중심에 서 있는 유신독재의 지도자,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동상을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시유지에 세우려는 사람들도 있다는 소식이다.
 
장준하 선생 서거 42주기 추모식이 열린 지난 8월17일 경기 파주시 탄현면 장준하공원에서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이 문재인 대통령의 추모사를 대독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장준하(1918~1975), 그 이름 세 글자만으로도 한국 현대사의 많은 굴곡들을 상기시킨다. 일제강점기 광복군 출신으로 반유신독재투쟁의 중심에서 두려움 없이 항거했던 언론인이자 정치가인 그가 60~70년대 내내 박정희 정권의 감시를 받다가 1975년 8월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 등반 중 실족, 추락사했다고 발표된 이래 그의 죽음은 42년째 ‘의문사’로 남아 있다. 이튿날인 8월18일 새벽, 검찰은 의문을 제기하거나 부검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그의 부인에게서 받고나서 시신을 유족에게 인도했다.
 
내리닫이 분단에 살어리랏다 길들어가는데
통일은 좋은가
통일은 좋은 것이다
라고 이 땅의 분단 까부수기 시작했다
용렬했던가
왜놈의 장교였고
왜놈의 앞잡이인 박정희
그 어느 터럭도 승인하지 않았다
분단을 죽여
하나의 겨레 살리기 위해
일어났다
싸웠다
< … >
경기도 포천땅 한 두메에서
돌 맞아 죽어
추락사로 발표되었다
 
처음에는 서북땅 야소교의 한 자유주의자였다가
차츰 민족주의였다가
마지막에는
신도 버리고
집도 자식도 다 버리고
시대 맨 앞장에 나아가 휘날리다가
그것이 죽음이 되었다
 
그렇게도 기꺼이 위선적이었다 미소였다
그러다 그렇게도 비위선적이었다 우레 쳤다
돌베개 베고
적막했다
장준하
 
아 잘난 놈은 삶이 괴롭다더라
죽어가는 것이
살아오는 것인가
역사는 죽었다가 살아오는 것인가
(‘장준하’, 별편)
 
평북 의주 출신으로 장로교 목사의 아들이었던 장준하는 1938년부터 3년간 정주의 신안소학교 교사로 근무한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1941년 일본 동양대학 철학과를 거쳐 1942년 동경 일본신학교로 전학해 학업을 계속한 그는, 소학교 교사 시절 제자 출신으로 서신왕래를 통해 좋은 감정을 주고받던 김희숙이 정신대에 끌려갈 위협에 처하자, 즉시 귀국해 그녀와 결혼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일본 형사들에게 요시찰 인물로 감시 받던 아버지와, 자신이 학도병을 피할 경우 가족이 받게 될 피해 등을 고려, “우리 집안의 불행을 내 한몸으로 대신하고자” 일본군 학도병에 자원하게 된다(장준하, 장준하 선생 10주기 추모문집 간행위원회 편, <장준하문집> 제2권 ‘돌베개’, 1985, 7쪽).
 
사실 그때 자원입대를 하지 않았어도 당시 상황상 강제징집을 당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할 것이다. 어쨌든 그는 학도병에 자원입대할 때부터 중국으로 배치되면 일본군을 탈출해 중경(충칭)의 임시정부로 갈 계획을 세웠고 결국 이를 실행한다. 즉, 1944년 7월7일 서주의 일본군 쓰가다 부대를 탈출해 중국 중앙군 소속의 유격대를 거치고, 안휘성 임천의 중국 중앙군관학교 임천분교 내 한국광복군 훈련반에서 3~4개월을 수료한 후 중국 중앙군 준위로 임관되어 중경 임시정부에 도달하는 1945년 1월31일까지, 6000리 길을 우여곡절을 겪으며 걸어간 것이다. 이후 장준하는 광복군 제2지대의 육군 중위로서 미 육군과의 합동훈련 협정에 따라 중국 시안에서 미군 전략첩보대(OSS) 대원으로 교육 받고 국내 밀파 특수공작원으로 대기하지만, 그 사이 조국이 해방되어 국내진공작전은 성사되지 않았다.
 
장준하는 서주로 떠나기 전 아직 평양 제42부대에 있을 때 면회를 온 신혼의 어린 아내에게 자신의 미래 행동에 대해 암시를 주는데, 어느 날 자신이 쓴 편지의 끝이 성경구절로 되어 있으면 그것이 마지막 편지로, 자신은 이미 일군을 탈출해 중국군 진영이나 임시정부의 어느 곳에 가 있을 것이라는 뜻이었다(앞의 책, 14쪽). 약속대로 그는 일본군을 탈출할 때 엽서에 짤막한 사연과 함께 다음의 구절을 써 보낸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로마서 9장 3절). 그와 아내 사이의 또 다른 암호 ‘돌베개’가 갖는 의미는 1971년에 출간된 장준하의 저 유명한 수기 <돌베개>의 발문에 나타나 있다. “창세기 28장 10-15절에 나오는 야곱의 ‘돌베개’이야기는 내가 결혼 일주일 만에 남기고 떠난 내 아내에게 일군탈출의 경우 그 암호로 약속하였던 말이다. 마침내 나는 그 암호를 사용하였다. “앞이 보이지 않는 대륙에 발을 옮기며 내가 벨 ‘돌베개’를 찾는다”고 하였다. “어느 지점에 내가 베어야 할 그 돌베개가 나를 기다리겠는가”라고 썼었다. 그후 나는 ‘돌베개’를 베고 중원 6천 리를 걸으며 잠을 잤고 지새웠고 꿈을 꾸기도 하였다. 나의 중원 땅 2년은 바로 나의 ‘돌베개’였다. 아니 그것이 나의 축복받는 ‘돌베개’여야 한다고 생각했다.”(앞의 책, 343쪽)
 
조국을 팔아버린 선조를 보며 “나는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이 가슴의 피눈물을 삼키며 투쟁하련다.”(앞의 책, 56쪽)라고 다짐했던 장준하. 그가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를 자신을 안내하는 이정표로 삼아 “광막한 중원 대륙 수수밭 속에 누워 침 없이 마른 입으로 몇 번이나 되씹었고 또 눈 덩어리를 베개로 하고 동사의 기로에서 밤을 지새우며 한없이 울부짖었던” 이유는 “이 말이 곧 나라를 빼앗긴 우리의 못난 조상에 대한 한스러움과 다시는 후손에게 욕된 유산을 물려주지 않으려는 우리의 단호한 결의 그것이었기 때문이다.”(앞의 책, 343쪽)라고 밝히고 있다.
 
시대의 사명 <사상계>, 역사로 살아남다
중국 중앙군관학교 임천분교의 한국광복군 훈련반 시절, 장준하는 김준엽, 윤재현과 함께 잡지 <등불>을 수작업으로 제2호까지 제작했는데 여기에는 그들이 탈출학병들을 대상으로 행한 강좌의 원고들과 시·단편소설·희곡·생활수기·만화가 실렸다고 한다. <등불> 1호를 두 권 만들어 80여 명이 돌려가며 읽어야 해서 표지를 튼튼히 만들어야 했는데, 천이 없어 김준엽이 자신의 내의를 깨끗이 빨아 표지로 사용했다는 일화가 있다(앞의 책, 105쪽).
 
이렇게 잡지와 처음 인연을 맺은 장준하는 1952년 9월 피난지 부산에서 문교부(현 교육부) 산하 ‘국민사상연구원’의 기관지인 월간지 <사상>을 12월호까지 4회 발행한 후, 이를 인수해 그 연속선상으로 1953년 4월 <사상계> 창간호를 선보이게 된다. 잡지 역사상 신기원을 이루었다 할만한 <사상계>는 ‘지식인들의 필독서’가 되었고 1960년에는 최대부수인 9만 7000부를 발행했는데, 그 당시 일간지인 조선일보의 발행부수 8만을 능가하는 월간지였던 것을 알 수 있다(고상만,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 민주주의자 장준하 40주기 추모 평전>, 오마이북, 2015, 90쪽). 그러나 초기의 제작 조건은 매우 열악해서, 그의 아내가 옷가지를 팔아 제작비에 보태고 장준하가 잡지의 기획부터 원고청탁·정리·편집·교정·조판·판매·수금 등 모두 혼자 해야 했던 데서도 그러한 상황이 잘 드러난다(김삼웅, <장준하 평전>, 시대의 창, 2009, 321~327쪽).
 
사상계 초판본. 사진/뉴시스
 
경기도 포천군 이동 약사봉 아래
< … >
그의 죽음보다
그의 의문 없는 삶이 먼저 떠오른다
난초잎새 같은
머리칼 쳐올려 깎은 흰 얼굴
그 어디에
큰 간담 있음을 내색이나 하겠는가
 
임시수도 부산에서
미국의 후원으로 월간지를 창간했다
하기야
광복군 시절의 OSS 인연에 이어
USIS 인연도 있을 법
 
미국의 한반도정책은 야릇하다
한국 지식인들의 역사의식 저항의식까지
파고들었다
북한에서 태어나
남한에 사는 계몽지식인들이 뭉치는 서북센터를 후원했다
 
발행인 장준하는 아내와 함께
잡지를 찍어
리어카에 싣고
서점마다 돌리기도 했다
 
김준엽 노능서 들과
중국 서주에서
멀고먼 사천 중경까지 갔던 사람
가서 김구 주석의 가난한 환영을 받았던 사람
 
박정희더러
밀수왕초라고 마구 공격하던 사람
 
박정희 3선개헌 반대의 싸움
앞장서서 이끌다가
그의 죽음으로
싸움을 이끌었다
(‘장준하’, 10권)
 
<사상계>는 반독재투쟁의 날카로운 펜이자, 민주주의·자유언론·남북통일 문제 등 사회적 담론 형성의 장으로 한국 지성사의 굵은 축을 담당했다. 장준하는 5·16 군사정변 당시 박정희 세력이 부정부패를 척결한 후 군인 본연의 임무로 돌아갈 것이라 믿어 1961년 6월 <사상계> 권두언에서 잠시 지지를 표명했으나 곧 판단의 오류를 깨닫고 7월호 권두언에 함석헌의 ‘5·16을 어떻게 볼까’를 실어 체포되기도 한다. 1975년 의문사를 당할 때까지 내내 박정희 독재정권에 용감하게 대항했던 그는 박정희의 친일 행적과 남로당 조직책 활동 경력을 폭로하는가 하면, ‘삼성 사카린 밀수 사건’을 공모한 박정희를 가리켜 ‘밀수왕초’라 칭하고, 월남전 파병으로 청년들을 팔아 정권을 유지한다고 비판하는 등, 박정희의 눈엣가시가 되어 14년(1961~1975) 동안 ‘국가 원수 모독죄’ 등으로 3번 구속되고 37번 연행되었다. 장준하가 두 번째 구속 당시 옥중출마를 선언하자 감옥에 있는 그를 대신해 <씨알의 소리>를 발행하던 함석헌 선생이 “하얀 머리칼”과 “하얀 수염”을 나부끼며 “하얀 두루마기 / 하얀 고무신 / 성큼 한걸음 나서”(‘함석헌’, 10권) 장준하를 국회로 보내지 않으면 감옥에서 죽게 되니 그가 감옥에서 살아나올 수 있게 지지해 달라고 청중에게 절절한 호소를 했다고 알려져 있다.
 
중앙정보부는 1963년부터 당시 관행이던 후불제 방식을 이용해 <사상계>에 부도공작을 펼쳤는데, 압력을 받은 총판업체가 <사상계>를 서점에 배포하지 않고 과월호를 한꺼번에 반품함으로써 재정난을 야기했을 뿐만 아니라, 부당한 세무조사·세금징수 등으로 타격을 가했다. 장준하가 제7대 국회의원으로 선출된 후 부완혁이 맡아 운영하던 <사상계>는 1970년 5월(통권205호) 김지하의 담시 〈오적〉을 실었다는 이유로 ‘사상계 필화 사건’을 겪고 휴간 끝에 1970년 9월 29일 인쇄시설 미비라는 이유로 등록이 말소되어 강제 폐간당하고 만다. 그러나 <사상계>가 낳은 역사적 순간들은 민주주의 운동사와 언론사, 지성사에 각인되어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1959년 2월 국가보안법파동(2·4파동)에 대해 ‘무엇을 말하랴 ― 민권을 짓밟는 횡포를 보고’라는 제목만 실어 무언의 강한 항의로 독자들의 반향을 불러일으킨 ‘백지 권두언’(통권67호)과, 1966년 10월 '특정재벌 밀수진상 폭로 및 규탄 국민대회'에서 행한 연설로 인해 장준하가 구속되었을 때 11월호의 권두언을 ‘이 난을 메꿀 수 있는 자유를 못 가져 죄송합니다 ― 교도소에서’라는 글귀로만 채운 백지 권두언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또한, 1958년 8월호에 실린 함석헌의 칼럼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도 필화사건에 휘말리는 등, <사상계>의 수난은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이 연명·계승되는 동안 지속되었다.
 
선생 스스로 요구한 ‘의문사’ 진상 규명
장준하 의문사의 중심에 서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 박근혜가 대선 후보로 나선 해인 2012년 8월, 장준하 선생의 유골 이장 과정에서 두개골 부위에 함몰된 원형의 상흔이 드러나고 검시 결과 타살로 밝혀지게 된다. 한 세대 이상이 지나도 밝혀지지 않은 원통한 의문사의 진실을 규명하라고 선생이 스스로, 37년 만에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우리들에게 요구한 것이다. 19대 국회에도 20대 국회에도 ‘장준하 특별법’(장준하 사건 등 진실규명과 정의실현을 위한 과거사청산 특별법안)이 발의되었으나 여전히 진척되지 않고 있다.
 
지난 2012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 오종선 조각가의 광복군 대위 장준하 유골을 형상화한 조각 작품이 설치된 모습. 그 뒤로 '장준하 선생 암살 의혹규명 100만인 서명운동 선포식'이 열리고 있다. 사진/뉴시스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2000~2004)의 제2기(2003~2004)에서 장준하 의문사를 담당했던 고상만 조사관에 의하면,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데 핵심적인 당시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와 보안사령부(현 기무사령부)의 비협조가 큰 문제로 보인다. 국가정보원의 경우 그나마 사건과 직접 연관 없는 최소한의 문서를 협조 받았으나, 기무사령부는 아무런 보존 문서도 없다는 ‘거짓말’로 전혀 협조하지 않았음을 고상만 전 조사관이 논증하고 있다. 예를 들어, 조사관이 사건현장 방문을 부인하던 105 보안부대장의 거짓말을 밝히고 그가 보안사령관에게 보고한 문서가 있음을 자백 받았지만, 기무사령부로터는 번번이 “존안 자료 없음”이라는 회신만 받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제2기 의문사위가 힘들게 찾아낸 1975년 8월 20일의 녹음테이프와 8월 17일 밤에 생산된 중앙정보부의 ‘중요 상황 보고’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녹음테이프는 실족사라고 주장한 목격자 김용환―후일 세부 진술을 계속 번복해 혼란과 의혹을 가중시킨 인물―이 20일 밤에서야 장례식장에 나타나 장준하의 동지들에게 사건을 설명한 것을 고(故) 문익환 목사가 이불 속 녹음기로 녹음한 것이고, 의문사위가 직접 찾아낸 중정의 ‘중요 상황 보고’ 문서는 8월 17일 오후 장준하의 자택으로 전화를 해 사고 소식을 알렸던 ‘괴전화’의 주인공을 김용환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고상만,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 장준하 의문사 사건 조사관의 대국민 보고서>, 돌베개, 2012, 221~224쪽). 게다가 당시 서울 시경(현 서울시 경찰청)이 작성해 중정에 입수되었다는 김용환 이름의 ‘특수인물 존안 카드’의 실체도 의문으로 남아 있다(앞의 책, 244~245쪽).
 
장준하가 살해당하기 전에 준비하던 거사의 내용―암살의 주요 원인이 되었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고상만 전 조사관은 1974년 12월 말 장준하 선생을 병문안 했던 법정스님과의 면담을 통해 그것이 ‘유신헌법 개정을 위한 제2차 100만인 서명운동’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장준하 선생은 이미 1973년 12월 ‘유신헌법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1974년 1월 8일 시행된 긴급조치 1호와 2호에 의해 백기완 선생과 함께 중형을 선고받았었다.)
 
그는 또한 이와 관련해 장준하를 감시한 자료들 중 ‘위해분자 관찰계획 보고서’의 내용을 밝히고 있는데, ‘장준하의 개헌운동 계획을 사전 탐지해 와해, 봉쇄함으로써 조직 확장과 세력 확산을 방지하고 공작필요 시 보고 후 실시’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거사의 내용이 개헌 청원 제2차 100만인 서명운동이었든 혹은 다른 무엇이었든, 장준하가 거사 날짜를 광복 40주년인 1975년 8월 15일에서 야당 정치인 김영삼의 외유를 고려해 그가 귀국하는 20일로 바꾸어 준비하고 있음을 안 중앙정보부가 박정희의 명령을 받아 1975년 8월 17일 필요한 ‘공작’을 실시한 것은 아닐지 강한 의혹을 품게 된다(고상만, 앞의 책, 260~263쪽).
 
장준하 선생! 그는 임천의 한국광복군 훈련반 시절 배고픈 동지들을 위해 크리스천으로서의 도덕성을 번민하면서도 밭의 고구마를 훔쳐내 먹인 사람이고, 술 마시고 잘못을 저질러 중국 육군형무소로 이송될 처지의 동료들을 인도주의에 입각해 구해낸 사람이며(장준하, 앞의 책, 109~114쪽, 118~124쪽), 1975년 1월 입원 중인 상태에서도 ‘박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발표하고 유신정권의 언론 탄압으로 백지광고 사태에 몰린 동아일보에 이를 광고로 게재해 광고비를 보탰으며, 본인이 받은 성금을―자신은 병원비가 없어 고생하면서도―또다시 성금으로 동아일보에 기탁했던 사람(고상만,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 242~244쪽)이었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대한민국에도 ‘진정한 보수’가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보수를 자칭’하는 친일 잔재 수구세력이 선생의 죽음에 얽힌 진실이 백일하에 드러날까 두려워 이를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 <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는 87화를 끝으로 '시즌1'을 종료합니다. 추후 시즌2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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