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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의 동물
오늘 부는 바람은 / 시선
2017-02-06 11:40:33 2017-02-06 11:40:33
망각은 당연하다. 고교 시절 국사 시간에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이다. 사람이 새로운 것을 접해서 머릿속에 저장하는 건 한계가 있다는 얘기였다. 수업 시간에 좀처럼 다른 얘기로 새는 법이 없던 선생님은 ‘망각 곡선’에 꽤 많은 시간을 할애하셨다. y축의 시간에 비해 기억을 뜻하는 x축의 값이 높아질수록 망각의 정도가 심해진다는 그래프를 열과 성을 다해 설명하셨다. 매년 그렸을 한반도가 숫자 3과 5를 겹친 것 마냥 엉성했던 것을 감안하면, 망각 곡선은 꽤나 디테일한 그림이었다. 조악한 그림으로 강조하고자 하셨던 바는 대강 이렇다. 그래프의 중간쯤에 이르면 완만한 상승 곡선을 그리는 구간이 있는데, 이때 복습을 철저히 해야 기억에서 잊히지 않는다는 애정 어린 조언이었다. 재밌는 얘긴가 싶어 귀를 기울였는데 역시나 공부 열심히 하라는 뻔하디 뻔한 선생님 말씀이었다. 귀여운 수준의 삐딱선을 타고 있던 당시의 나는 그 말씀을 새겨듣지 않고 복습에 무관심했다. 그래서 매 시험마다 망각 곡선과 마주해야 했다.
 
시험지를 읽으면 읽을수록 수업 시간에 배웠던 내용은 기억이 안 나고 짝꿍이랑 떠들었던 농담, 선생님 몰래 했던 낙서만 기억날 뿐이었다. 근현대사 지문을 읽을 때도 그랬다. 수업 듣기 전 점심시간에 먹었던 메뉴도 기억하고 심지어 칠판에서 망각 곡선을 보면서 지루해하던 순간도 기억하는데 기가 막히게 수업 내용만 기억이 안 났다. 시험이 끝나고 교과서를 들춰보며 답을 확인할 때 나는 기억의 유한함에 좌절했다.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의 유한함을 느낀다는 게 다행인지 모르겠다. 사법고시를 패스하고 승승장구해 나랏일까지 돌봤던 분도 툭하면 기억이 안 난다니 말이다. 물론 그에게도 망각의 이유는 분명했다. 이를테면 이제 나이가 들어서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는 등의. 하기야 젊은 시절 대통령 선거 전략까지 기획했으니 일흔이 넘은 지금 몇 년 전 일을 기억하기에는 기력이 달릴 수도 있다. 없는 간첩도 만들어내고 헌법 초안도 작성했고, 워낙 많은 일들을 해내셨으니 나라 전체를 뒤흔든 사건의 주역을 만났는지 가물가물할 수도 있을 테다.
 

 
사진/바람아시아

 

 
결국 입신양명의 기반이었던 총명함을 버리고 그는 망각의 동물이 되기로 작정했다. 일찍이 권력의 달콤함을 맛본 엘리트가 망각의 동물이 되기로 작정한 결과는 몇 평 되지 않는 좁다란 서울구치소 감방이다. 엘리트 코스를 밟아오면서 손수 가득 채웠을 법무부 호송 차량에 실려 조사를 받으러 가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처지가 변했다고 태도까지 변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20대에 입신해서 4,50대 부하직원들을 대했던 그가 특검 앞이라고 달라질 것 같지 않으니까. 손목을 감싼 수갑에서 어떻게 미꾸라지 마냥 빠져나갈까 고민하는 그를 상상하는 게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옛날 그때처럼 법이라도 바꿀 생각을 할는지 아무도 모른다. 아니면 이번에도 기억이 안 난다면서 기억의 밑천을 드러내는 방법도 있다. 어떤 방법이 됐든 준비는 완벽하게 했으리라고 추정한다. 구치소에 반입이 안 되는 금속 안경테, 넥타이 따위는 일절 걸치지도 않은 걸로 충분히 알 수 있다. 많은 걸 잊었어도 빠져나갈 방법은 아직 잊지 않은 모양이다.
 
환경에 빠르게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인간의 뇌는 기존의 사고와 행동에 반하는 명령을 내린다. 어려운 말로 뇌의 가소성이라 하는데, 쉽게 이해하자면 생존의 문제에 있어 가치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지금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과거의 사실을 잊는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그에게 망각은 당연하다. 생존을 위해 기억을 없애는 데 신념이나 숭고한 가치관 같은 건 거추장스럽다. 지금껏 걸어온 길에도 미련 없다. 이제 그는 망각의 동물이 되어 좁은 감방에 갇혀있다. 1월 한기가 도는 마룻바닥에 앉아 있을 그는 또 어떤 망각을 준비할까.
 
동지훈 바람저널리스트 baram.news  T  F
 
 
 
**이 기사는 <지속가능 청년협동조합 바람>의 대학생 기자단 <지속가능사회를 위한 젊은 기업가들(YeSS)>에서 산출하였습니다. 뉴스토마토 <Young & Trend>섹션과 YeSS의 웹진 <지속가능 바람(www.baram.news)에 함께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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