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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천경자 '미인도' 진품 결론…소장이력·감정 확인(종합)
압인선·숨은 밑그림 등 특유 제작·채색기법 결과 분석
2016-12-19 18:07:19 2016-12-19 18:07:19
[뉴스토마토 정해훈기자] 지난 25년 동안 위작 의혹으로 논란이 된 고(故) 천경자(1924~2015) 화백의 '미인도'가 결국 진품으로 판정됐다. 서울중앙지검 형사6부(부장 배용원)는 19일 작품 소장이력 조사, 전문기관의 과학감정, 전문가 안목감정, 미술계 전문가 자문, 국립현대미술관 관계자와 위작자를 자처해 온 화가 권춘식(69)씨의 조사내용 등을 종합한 결과 '미인도'는 진품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검찰은 위작 논란과 관련해 천 화백의 차녀 김정희(62·여) 미국 메릴랜드주 몽고메리 컬리지 미술과 교수가 바르토메우 마리 리바스(49) 관장 등 국립현대미술관 전·현직 관계자 6명을 상대로 고발한 사건을 수사한 결과 이날 정모(59) 전 학예실장을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 기소하고, 나머지 피고소·고발인 5명을 혐의없음으로 판단해 불기소 처분했다.
 
앞서 지난 1991년 4월 천 화백은 '미인도' 포스터와 원본 확인 후 재료, 채색기법 등이 자신의 작품과 다르다는 등의 이유로 위작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현대미술관은 같은 달 기자회견을 열어 '미인도'의 안료, 제작시기, 한국화랑협회의 판정 등을 근거로 '진품'이라고 발표했다. 이후 청전 이상범 작품의 위작 사건으로 구속된 권씨가 검찰 조사에서 '미인도'를 자신이 그렸다고 주장하고, 지난해 8월 천 화백이 사망한 이후에도 언론 인터뷰에서 재차 위작을 주장했다.
 
이에 김씨는 지난 5월 리바스 관장 등 6명에 대해 고소·고발장을 제출했고, 검찰은 '미인도'와 서울시립미술관, 현대미술관 등이 소장하고 있는 천 화백의 진품 13점, 권씨의 모작 1점을 대상으로 대검찰청, 국립과학수사연구원, KAIST 등과 함께 X선·적외선·투과광사진·3D 촬영, 디지털·컴퓨터영상 분석, DNA 분석, 필적감정 등의 감정을 진행했다.
 
◇계엄사·재무부 등 거쳐 현대미술관 수장고 보관
 
특히 검찰은 이번 수사에서 '미인도'의 진위를 규명할 수 있는 핵심적 단계인 소장이력을 확인했다. 검찰이 파악한 소장이력을 보면 천 화백은 1977년 당시 한 기관의 대구분실장 오모씨의 부인에게 '미인도'를 선물했고, 오씨의 부인은 다시 대학 동문인 김모씨의 부인에게 선물했다. 이후 계엄사령부 산하 기부재산처리위원회가 1979년 김씨로부터 '미인도'를 기부받아 재무부에 처리를 의뢰했고, 문화공보부를 거쳐 1980년 5월3일 현대미술관 수장고에 보관됐다.
 
검찰에 따르면 천 화백의 특유한 작품 제작방법은 D화랑의 화선지를 배접한 후 바탕작업 시 화선지 위에 백반, 아교, 호분으로 바탕칠하고, 수없는 덧칠 작업을 거쳐 석채 안료로 채색을 완성한다. '미인도'의 분석 결과 천 화백의 제작방법이 그대로 구현됐으며, 특히 육안으로는 관찰되지 않는 날카로운 필기구 등으로 사물의 외곽선을 그린 자국을 뜻하는 압인선이 '미인도'와 비교 진품의 꽃잎, 나비 등 섬세한 표현이 필요한 부분에서 공통으로 식별됐다.
 
천 화백의 특징적인 채색기법은 수없이 수정과 덧칠을 반복해 작품의 밀도와 완성도를 높이는 방식으로, 그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그림 밑층에 다른 밑그림이 존재한다. 육안으로 관측되는 '미인도'의 화면 중 화관 풀잎 밑층에서 다른 형태의 풀잎선, 입술 밑층에서 다른 위치·형태의 입술 모양, 머리카락의 밑층에서 숨겨진 꽃 그림 등이 발견된다. 반면 박씨가 그린 또다른 모작에서는 표층 화면과 다른 형태의 밑그림이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또 '미인도'의 화면 중 앞머리, 눈썹·콧날·목과 쇄골 부위 선, 왼쪽 안륜근, 인중 표현, 풍성한 생머리 밑층의 파마머리 형태 등 육안으로는 관찰되지 않는 세밀한 스케치가 발견되며, 이 스케치 이미지를 올해 공개된 '미인도'보다 1년 그린 천 화백의 작품 '차녀 스케치' 이미지와 겹쳐보면 세부 표현방식에서 유사한 것이 확인됐다. 검찰은 결국 '차녀 스케치'를 바탕으로 1977년에 '미인도', 1981년에 '장미와 여인'이 완성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위작 주장 화가 "절대 흉내 낼 수 없다" 진술 번복
 
검찰의 감정 과정에서 김씨의 요청으로 프랑스 '뤼미에르 테크놀로지' 감정팀이 지난 9월20일부터 26일까지 방한해 특수 카메라로 '미인도'와 진품 9점을 스캔 촬영한 후 각 사진 이미지를 수치화하는 방법으로 분석과 패턴화하는 작업이 이뤄지기도 했다. 감정팀은 '미인도'가 '장미와여인'을 보고 제작한 위작으로, 명암대조의 표준편차값 등을 확률계산식에 대입해보면 '미인도'의 진품 가능성은 0.00002%라는 감정 의견을 도출해 검찰에 보고서를 전달했다.
 
하지만 검찰은 '미인도' 감정 보고서에는 감정팀이 홍보한 내용과 달리 심층적인 단층분석방법이 제시되지 않는 등의 이유로 해당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감정팀이 사용한 작품 간 명암대조와 밝기 계산식을 '미인도'를 제외한 나머지 9개 진품에 그대로 대입한 결과 1977년 작품 A와의 진품 확률이 4.01%, 1977년 작품 B와의 진품 확률이 4.31%로 계산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권씨는 언론 인터뷰 등에서 위작 시기와 '미인도'의 모본에 대한 진술이 일관되지 않고, 제작방법에 대해서도 화첩 종이 위에 '장미와 여인' 등 여인상 3점을 조합해 연필로 스케치한 후 수정이나 압인선 없이 그대로 분채 안료로 채색했다고 진술하는 등 실제 '미인도'의 분석 결과와 일치하는 부분이 없던 것으로 조사됐다. '미인도' 원본을 확인한 후에는 "본인이 그린 작품이 아니고, 진작임을 넘어 명품에 가까운 수작"이라며 "덧칠의 정도, 깊은 색감 등에 비춰 본인의 위작 수준으로는 절대 흉내 낼 수 없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 수사 결과 정 전 실장은 지난해 11월 언론 기고문 등에서 "이 사건은 이미 국과수와 KAIST의 과학감정 결과 '진품'으로 확정되고, 법원에서도 '판단불가' 판정을 내렸다"라는 등 공연히 허위사실을 적시해 사자인 천 화백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같은 혐의를 받고 있는 다른 전직 학예실장 등 2명은 올해 2월 방송에 모자이크와 음성변조 처리돼 방영된 인터뷰 내용이 착오나 불확실한 기억의 혼동으로 인한 발언으로 허위성에 대한 인식이나 명예훼손의 고의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리바스 관장 등 현직 현대미술관 관계자 등 3명도 지난해 11월 '미인도'가 천 화백의 작품이란 취지를 기재하는 등 저작권법 위반 혐의로 고발됐지만, 검찰은 이러한 행위에 대해 저작자 아닌 자를 저작자로 표시했거나 저작물 그 자체를 공표했다고 볼 수 없다고 봐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검찰 관계자는 "대표적인 여류 화가인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 사건은 1991년 위작 논란 이후 25년간 풀리지 않는 '위작 스캔들'로 남아 있다"며 "천 화백 사망 후 진실 규명을 원하는 유족과 언론의 관심이 큰 점을 고려해 검찰이 직접 수사를 진행했다"고 말했다.
 
배용원 형사6부장이 1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소회의실에서 고 천경자 화백 '미인도' 위작 논란 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정해훈 기자 ewigjung@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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