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황인표기자] 직장생활 4년차인 권영순(31)씨는 얼마전 국내제약계 회사에서 외국계 회사로 이직했다. 전 직장에서 1위 매출을 올릴만큼 실적도 좋고 인정도 받았지만 미래가 불확실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권씨가 장래를 위해 준비하는 건 연금저축과 보험이 전부. 권씨는 퇴직연금에 대해 "퇴직금은 들어봐도 연금은 들어본적이 없다"며 "국민연금과 개인적인 연금저축으로 노후를 준비할 것"이라고 말했다.
직장생활이 좀 더 오래된 사람도 퇴직연금에 대해 생소해하긴 마찬가지다. 시중은행의 홍보부장인 김 모(43)씨도 "퇴직연금을 잘 모른다"며 "보험과 현금성 자산으로 노후를 대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지난 2005년 도입된 퇴직연금은 가입 비율이 전체 상용근로자의 20%대에 머물고 적립금도 애초 15조원 예상에 한창 모자란 9조원(2009년 9월 기준)에 불과하다. 선진국에서는 일반적인 노후준비의 수단인 퇴직연금이 국내에서는 왜 도입이 미미할까?
◇퇴직연금 적립금 현황
<출처 = 노동부>
◇ "특별한 혜택이 없다"..신뢰 부족
퇴직연금제도 부진 이유로 첫째 꼽히는 것은 '관성'때문. 아직까지 한국에서 퇴직금하면 중간에 정산받거나 퇴직시 한꺼번에 받는 목돈 개념이 강하다. 퇴직금을 금융 상품에 투자해 노후 연금형태로 받을 수 있다는 것 자체를 꺼리는 사람이 많다.
기존 형태로 퇴직금을 받을 경우 근로자로서는 당장 목돈으로 작은 가게라도 차릴 수 있고 중간정산시 단기적인 생활자금으로도 쓸 수 있다. 사업주 입장에서도 번거롭게 퇴직연금으로 정산하느니 중간정산을 통해 퇴직금 적립 부담을 줄일수 있기 때문에 도입이 저조한 실정이다.
또 무조건 사외에 적립해야 하기 때문에 자금의 경직성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다.
기업의 인식도 문제다. 하나금융연구소 퇴직연금브리프 9월호의 국내 89개사(외국법인 포함)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 기업의 91%가 퇴직연금제도를 도입하지 않았으며, 절반가량은 퇴직연금에 대한 도입 일정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유를 묻자 30% 기업은 특별한 혜택이 없다는 점을 꼽았고 27%는 동종 산업 내 도입 기업이 없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그외 부족한 재정상황(9%), 근로자 반대(4%) 등의 답변이 뒤를 이었다.
작년 금융위기도 큰 영향을 끼쳤다. 올해 초 펀드 환매 사태처럼 금융위기 이후 금융투자상품에 대한 불신이 커졌다. 금융자산에 대한 장기적 전망이 불투명하다보니 "일단 현금을 받고 보자"라는 인식이 커졌기 때문에 근로자나 사업주 모두 퇴직연금을 불안하게 바라볼 수 밖에 없다.
◇ '근퇴법' 국회 통과 시급
또 다른 이유로 국회 내 계류중인 법안 문제가 꼽힌다. 작년 11월 정부에서 퇴직연금 제도 개선을 위해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지만 1년이 지난 지금까지 국회내 계류 중이다.
개정법안은 ▲ 퇴직금 중간정산 제한 ▲ 확정급여(DB)형, 확정기여(DC)형 동시 가입 가능 ▲ 신규 설립 법인, 퇴직연금 의무 가입 등의 조항이 포함돼 있다. 국회가 가져야할 사회적 책무를 다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퇴직연금 전문가가 부족한다는 문제도 제기된다.
성주호 경희대 경영학과 교수는 "퇴직연금이 도입되면서 수많은 금융기관이 이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며 "하지만 미비한 상태에서 시장이 혼탁해지고 점점 레드오션(과열화된 시장)이 돼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퇴직연금 사업자들의 사업 능력 설명 등이 아직 부족하다는 분석이다.
김종철 노동부 임금복지과 과장은 "금융기관들이 이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잘못된 관행에 대해선 정부와 금융당국이 협력해 바로 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 "은퇴 후 필수자금으로 봐야"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퇴직연금에 대해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며 "은퇴 후 생활자금으로 봐야한다"고 말했다.
이어 "고령화에 이어 저출산까지 지속되면서 기존 공적연금의 재정 불안이 커지고 있다"며 "외국에서는 이를 보완해주는 대표적 수단이 퇴직연금"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선결될 과제는 노사간 합의다. 근로자와 사업주가 장기적인 이득을 생각해 퇴직연금 도입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노사간 전략 싸움으로 눈치를 보기 보단 사업주는 기업 가치를 높이는 기회로, 근로자는 자신의 복리를 챙길 수 있는 기회로 봐야 한다는 얘기다.
또 다른 과제는 제도화. 즉 국회 내 계류중인 근퇴법 통과를 통해 퇴직연금 도입을 법제화할 필요가 있다. 성주호 교수는 "국회가 먼저 나서서 제도화를 해야 한다"며 "퇴직연금 도입은 선진국으로 가는 첫째 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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