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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바라지의 장소, 아파트의 공간
2016-09-02 17:55:09 2016-09-02 17:55:09
얼굴 새카맣게 타는 게 겁나지 않았던 꼬마였을 때, 나는 주공아파트에 살았다. 아파트 뒤편에 아무렇게나 심어 놓은 대파와 잡초 사이에 난 조그만 오솔길에 요정이 산다며 친구들과 숨죽여 다녔다. 비 오는 날이면 학교 가는 지름길 돌담에 붙어있는 달팽이를 잡았다. 아파트 놀이터에서 바바리맨을 만나 혼비백산해 울며 도망쳤던 기억도 있다. 이사 간 뒤 그 장소는 유년기를 상징하는 하나의 기억이 됐다. 얼마 전 선크림을 바르고 햇빛을 가리며 추억을 더듬어보려 그 장소를 다시 찾았다.  
 
주공아파트는 사라지고 두 배 길쭉한 롯데캐슬아파트가 생겼다. 오솔길, 달팽이가 있던 돌담 모두 찾을 수 없었다. 학교 가는 길에도, 학교 뒤에도 고급 아파트가 생겼다. 주차게이트가 나를 막았다. 저 높은 아파트 아래 깔린 내 장소가 보이지 않았다. 나에게 주공아파트는 추억이 녹아있는 장소였지만, 재건축 관계자에겐 단지 공간이었다. 낙후되고, 정비가 필요하고, 좋은 아파트를 만들고 싶은, 말 그대로 ‘비어있는’ 공간. 
 
장소를 잃은 수많은 사람들이 떠올랐다. 70년대 ‘난장이’가 겪은 도시재개발과 강제철거. 그리고 70년대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현재진행형인 난장이들이 보였다. 대부분은 빈번하게 폭력을 겪었다. 옥바라지 골목에도 난장이가 산다. 서울 종로구 무악동 옥바라지 골목은 투옥된 독립운동가에게 밥과 옷가지를 챙겨주기 위해 모인 가족이 생활하기 위해 만들어진 여관골목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아내 이혜련 선생, 김구 선생의 모친 곽낙원 선생도 이 곳에서 옥바라지를 했다. 눈물자국 가득한 삶의 애환이 담긴 골목에서 삶을 이어가던 사람들은 새로 생길 지상 16층, 195가구 아파트를 위해 쫓겨났다. 
 
옥바라지 골목은 재개발정책으로 지난 3월부터 본격적인 철거가 진행됐다. 철거에 응하지 않는 주민들과 재개발사업조합 측의 갈등은 악화됐고, 법원은 조합원의 손을 들어줬다. 좁은 골목에는 용역업체의 기다란 쇠붙이와 폭력이 있었다. 지난 5월 강제철거 다음 날 찾았던 옥바라지 골목은 노란 펜스로 가려져 있었다. 펜스 바깥 천막에 자리 잡은 옥바라지 골목 주민인 이용범 씨의 손가락에는 보호대가 감겨있었다. 강제철거당시 다친 손이라고 했다. 응급실에 실려간 사람도 있다며, 용산참사 이후에도 여전히 폭력적이라고 했다. 이주하지 않은 주민 대부분은 평생을 이 골목에서 생계를 이어간 사람들이었다. 삶의 장소에서 쫓겨나기 전 마지막 몸부림은 절박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강제철거현장을 방문해 "서울시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이 공사를 멈출 것"이라며 철거를 잠시 중단시켰다. 그러나 3개월 후 8월 22일 옥바라지 골목 철거가 재개됐다. 옥바라지 골목이 문화재라는 가시적인 증거를 찾을 수 없고, 조합원 측이 명도소송에서 이겨 철거를 중단시킬 명분이 없기 때문이다. 대신 아파트 옆에 옥바라지 골목에 남은 건물 일부를 재활용하거나, 한옥자재를 이용해 기념관을 만들어 준다고 했다.
  
법과 원칙대로 철거가 진행됐다. 투옥된 독립운동가가 옥바라지 골목에 기념비를 세웠다면 골목 전체가 보존될 수 있었을까. 새로 생기는 말끔한 기념관은 쫓겨난 사람들의 잃어버린 장소를 대신해 줄 수 있을까. 장소의 의미는 타인에게 증명할 수 있어야만 가치 있는 것일까. 진득하게 눌어붙은 삶을 억지로 떼어내고 폭력과 야만의 터전 위에 다른 이들을 위한 아파트가 생긴다. 
 
 
옥바라지 골목. 사진/남경지
 
 
 
 
남경지 baram.asia  T  F
 
 
 
**이 기사는 <지속가능 청년협동조합 바람>의 대학생 기자단 <지속가능사회를 위한 젊은 기업가들(YeSS)>에서 산출하였습니다. 뉴스토마토 <Young & Trend>섹션과 YeSS의 웹진 <지속가능 바람>(www.baram.asia)에 함께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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