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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레이케미칼, 약속파기에 불법 채권추심까지…중소기업 고사위기
생산라인 증설 제안…물량 미확보로 설비 가동 중단되자 "선급금 내놔라"
2016-05-31 17:52:38 2016-05-31 19:21:51

[뉴스토마토 최병호기자] 화학·섬유소재 일본계 기업인 도레이케미칼이 협력업체와의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이면합의를 통한 불법 채권추심까지 벌였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현재 이 기업은 경영난 가중으로 기업회생 절차를 밟는 등 고사 직전에 몰렸다. 
 
서울시 강동구에 위치한 중소기업 A사는 지난 2000년 설립, 도레이케미칼 전신인 (주)새한과 웅진케미칼 시절부터 섬유 원료를 구매, 각종  침구류, 위생재, 자동차 내장재, 필터 등에 사용되는 화학·섬유 원료를 수출해왔다. 설립 10년 만인 지난 2010년 연매출 300억원대를 돌파했으며, 중소기업청에서 선정하는 경영혁신형 중소기업과 한국무역협회에서 지정하는 전문 무역상사에 이름을 올렸고, 거래은행으로부터 신용등급 A를 받을 만큼 역량을 인정받은 알짜 기업이었다.  
 

알짜기업에서 위기로…2차 생산라인 증설

 
A사가 위기에 몰린 것은 지난 2012년 초 경북 구미시에 있는 A사 공장에 생산라인을 추가하기로 계약하면서부터다. 직접 장비를 설치할 경우 약 150억원의 비용지출이 부담스러웠던 도레이케미칼(당시 웅진케미칼)은 A사에 설비투자를 제안, 선급금으로 20억원을 주고 생산라인이 완공되면 일정 물량의 납품 계약까지 맺기로 했다. A사 대표인 윤모씨는 "도레이케미칼로부터 '추가 설비 마련에 부족한 20억원과 원자재를 줄 테니 설비를 완공해 신제품도 개발해주고 임가공품을 납품해달라'는 제안이 왔다"고 말했다.

 

A사 입장에서는 설비투자 비용이 상당 부분 부담됐지만 장기적으로 따져보면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다. 2년 전 도레이케미칼로부터 월 700톤(3억원 상당) 정도의 물량을 발주 받기로 하고 1차 생산라인을 만들어 정상적으로 설비를 가동해왔기에, 2차 라인에서도 물량 약속이 이행되리라 믿었다. A사는 결국 2012년 2월29일 도레이케미칼과 2차 라인에 대한 계약을 맺게 된다.

 

◇도레이케미칼(옛 웅진케미칼)과 A사가 2차 생산라인 투자와 관련해 체결한 계약서 사본. 사진/뉴스토마토

 

그러나 거액의 설비투자를 진행해 2차 라인을 설치하자 상황이 돌변했다. 웅진그룹이 2012년 9월 법정관리를 신청하고 계열사인 웅진케미칼이 시장에 매물로 나오는 등 웅진케미칼의 경영이 전반적으로 어려워진 시기와 맞물리면서 임가공 약속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구미공장 2차 생산라인은 2012년 말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가동되지 않았다. 윤 대표는 "도레이케미칼은 처음에는 조금만 기다리라며 차일피일 미루더니 나중에는 시황이 나쁘다는 등의 이유를 대면서 만나지도 않고 전화도 피했다"며 "어렵게 연락이 닿아도 '회사의 방침이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며 입을 닫았다"고 주장했다.

 

◇도레이케미칼코리아(옛 웅진케미칼)과 A사가 공동 투자에 설치한 섬유 장비. 그러나 도레이케미칼의 임가공 물량 발주가 지연되면서 장비는 4년째 가동이 멈췄다. 사진/뉴스토마토

  

도레이케미칼도 2012년 말 2차 생산라인 완공 후 A사에 임가공 물량을 발주하지 않은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고의가 아니라 애초 계약서에 '물량'을 명문화하지 않았고, A사도 이런 사실을 알고 계약을 했으면서 뒤늦게 물량 타령을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취재 결과, 도레이케미칼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었다. 계약서에는 '물량'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2차 생산라인과 관련, 양사가 수차례 회의를 할 때마다 도레이케미칼 영업담당 임직원들은 구체적인 발주 물량을 공공연히 언급하며 약속을 반복했다.

 

취재팀이 입수한 '2011년 7월15일 2차 PROJECT설비 및 생산품종구성 내용 협의' 자료를 보면, 도레이케미칼과 A사는 1차 생산라인에 대해 월 800톤, 2차 라인에서는 월 700톤씩 생산키로 협의했다. 이어 2012년 4월4일 열린 회의에서도 도레이케미칼 담당자는 "A사에 피해가 안 가게 (장비를) 풀가동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며 "(2차 생산라인에서) 'BLACK 및 OB 타입의 섬유' 가동을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도레이케미칼(옛 웅진케미칼)과 A사가 2차 생산라인과 관련해 협의한 내용. 양사는 2차 생산라인에서는 월 700톤을 생산하기로 협의했다.(노란색 박스) 사진/뉴스토마토

 

A사로서는 이미 도레이케미칼로부터 1차 라인에서 월 700톤 정도 물량을 발주 받아 가동하고 있었고, 2차 라인에 대해서도 여러 회의를 통해 일정한 물량을 확보해주겠다는 말을 들었기에 비록 계약서에 '물량' 언급이 없더라도 전혀 의심하지 않고 투자를 감행할 수 있었다. 윤 대표는 "도레이케미칼과의 관계만 생각해 계약서에서 물량을 분명히 언급하지 않은 게 천추의 한"이라고 말했다.

 
도레이의 역공…"선급금 변제하라"
 
역공도 있었다. 도레이케미칼로부터 발주 약속이 지켜지지 않던 차에 도레이케미칼이 내민 것은 선급금 20억원에 대한 변제였다. 계약서에 따르면, A사는 12개월 거치한 후 2차 생산라인에 대한 도레이케미칼 선급금 변제를 24개월로 분할 상환하기로 돼 있다. 하지만 애초 선급금 변제 계약도 2차 라인 가동을 전제로 한 만큼 물량을 발주 받지 못해 매출이 떨어진 A사는 선급금을 줄 여력이 없었다.

 

결국 A사는 2차 생산라인 문제로 발이 묶여 실적마저 악화됐다. 이 회사의 감사보고서를 보면, 2012년 매출 351억300만원과 영업이익 9억3000만원, 당기순이익 1억5400만원을 거뒀으나 이듬해는 매출이 316억1300만원을 기록해 전년보다 9.9% 줄고, 영업이익도 6억1300만원으로 34.0% 급감했다. 같은 해 당기순손실은 3억5100만원으로 적자 전환했다.

 

자금사정이 경색되면서 A사는 2014년 2월 말 법원에 기업회생 신청을 결정했다. 지난해 이 업체의 매출은 107억9400만원, 영업손실은 3억6600만원, 당기순손실은 4억7900만원으로, 불과 3년 만에 고사 직전으로 내몰렸다. 윤 대표는 "경영 악화에 도레이케미칼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며 "글로벌 기업이 중소기업과 맺은 계약을 헌신짝처럼 저버렸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A사가 기업회생 절차에 들어간 상황에서도 선급금 반환
명목으로 2014년 8월부터 올해 4월까지 매달 약 3500만원씩, 7억5000만원 상당의 돈을 가져갔다. 윤 대표는 "법원에서 기업회생 절차를 밟는 만큼 정상적인 변제능력이 없다"며 "그러나 도레이케미칼은 다른 채권자들 모르게 불법 추심을 하면서도 채무 변제에 대한 어떠한 확인서도 공식적으로 써주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자료/뉴스토마토

 

이에 대해 도레이케미칼 관계자는 "불법 채권 추심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며 "A사로부터 월 3500만원씩 정산받은 것은 맞지만, 이는 현재 가동 중인 1차 생산라인에 대한 단가조정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이조차도 사실이 아니었다. 도레이케미칼은 A사 대표를 형사고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이면합의를 통해 불법 채권 추심을 강요한 것으로 확인됐다. 도레이케미칼과 A사가 2차 생산설비에 대한 선급금 변제를 위해 지난 2014년 7월 맺은 합의서에 따르면, "A사와 도레이케미칼은 폴리에스테르 섬유의 임가공 계약을 맺고 용역을 제공하고 있는바, 이런 임가공 용역과 관련해 임가공비의 기준 단가를 15% 인하 조정해 A사가 도레이케미칼에 임가공비를 지급하는 방법으로 선급금 20억원에서 공제한다"고 명시돼 있다. 또 도레이케미칼 영업 담당자와 A사는 이면합의를 위해 지속적으로 연락하며 "차입금 상환 금액을 정리하자"는 식으로 협의를 진행했다.
 
이는 현행법에 어긋나는 불법 채권 추심이다. '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기업회생 절차를 밟고 있는 기업에 대해 법원을 통하지 않고 채권자와 채무자 간 합의를 통해 채권을 추심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금지돼 있다.
 
도레이케미칼은 자신들도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도레이케미칼 관계자는 "2차 생산라인은 윤 대표가 사업확장에 욕심을 내면서 먼저 투자를 요청했다"며 "회의 과정에서 물량을 확보해주겠다는 것은 여러 방안 중 하나며, 계약서에 매월 일정한 물량을 주겠다는 약속은 전혀 한 바 없다"는 입장을 되풀이했다. 단가조정을 통해 선급금을 갚는다는 합의서에 대해서도 "여러 대안 중 하나로 검토한 것"이라고 석연치 않은 해명만 내놨다. 

최병호 기자 choibh@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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