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30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끝으로 9월부터 중국·미국·일본·러시아 순으로 이어진 하반기 주변 4강 정상외교를 마쳤다. 그러나 미·중의 힘겨루기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휩쓸리는 모습을 보였고, 한·일 정상회담은 결과적으로 안 하느니만 못한 상황이 펼쳐지면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미·중의 동북아 주도권 경쟁이 치열해지는 2015년의 정세에서 한국이 갈 길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첫 단추는 제대로 꿰었다. 박 대통령이 9월3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항일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 70주년 열병식’에 참석하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하자 박 대통령의 대외정책을 비판하는 쪽에서도 좋은 결정이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미국의 은근한 불참 압력을 뿌리치고 열병식에 참석함으로써 균형외교의 새 장을 열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열병식 참석 사흘 전 한·미 외교장관회담 등을 통해 미국에 한국의 입장을 설명한 것도 외교 테크닉상 괜찮았다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호평은 오래 가지 못했다. 10월 중순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을 방문한 박 대통령은 한국이 중국에 쏠리고 있다는 이른바 중국경사론의 뿌리를 뽑으려는 듯 이번에는 미국에 심하게 치우치는 행보를 보였다. 10월14일 ‘한미 우호의 밤’ 행사에서 있었던 박 대통령의 발언이 대표적이었다. “한국은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재균형 정책의 핵심축이다." 중국 압박을 위한 한·미·일 3각 체제 구축을 뜻하는 재균형 정책에 적극 협조하겠다는 뜻이었다. 박 대통령은 그 전날에는 “한미동맹의 기적의 역사를 한반도 전역으로 확대해 나가야” 한다고도 말했다. 한·미가 주도하는 통일을 이뤄 미국의 영향력이 중국의 턱밑까지 미치도록 하자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남중국해 문제를 두고 본격적인 갈등 양상을 보이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외교적 활로를 뚫어야 했던 한국은 이처럼 중국에 가서는 중국의 손을, 미국에 가서는 미국의 손을 들어주며 오락가락했을 뿐이었다. 김준형 한동대 교수는 “한국이 주도하거나 만드는 프레임이 하나도 없었다”라며 “갈등이든 협력이든 평화든 미·중이나 미·일 등이 만들어 놓은 프레임에 적응하기에만 급급한 모습을 보였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이같은 박 대통령의 외교를 ‘부채외교’(indebted diplomacy)라고 표현했다. “외교를 하면 상대국에서 뭔가를 가져와야 하지만 한국은 실제로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자꾸 뭔가를 갚아야 하는 듯한 상황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한·중 정상회담을 하고 나서는 마치 미국에 빚을 진 것처럼 여겼고,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마치 중국에 빚을 지게 된 것 같은 상황을 만들었다”며 “당당하게 할 얘기가 많았던 일본에조차 오히려 빚을 진 처지처럼 됐다”고 지적했다.
11월2일 한·일 정상회담 이후의 상황을 보면, ‘박 대통령 취임 후 첫 한·일 정상회담’이라는 의미를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었는지 의문이 제기된다. 회담 전과 후의 상황에 아무런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최대 쟁점이었던 위안부 문제에 대해 박 대통령은 ‘연내 타결’을 강조했지만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호응하지 않았다. 그후 열린 한·일 국장급 협의에서도 진전이 없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은 지난 2일 <니혼게이자이신문> 인터뷰에서 “(한·일 정상회담에서) 일치한 것은 협의를 가속화한다는 것뿐이다. ‘연내에’라고는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고 못을 박았다. 사실상 연내 해결이 불가능함을 선언한 것이다. 정세현 한반도평화포럼 상임대표(전 통일부 장관)는 “미국에 등 떠밀려 한·일 정상회담을 하다 보니 위안부 문제에 대한 태도 변화를 이끌어내기 힘들었다”며 “만난 것 자체로 일본에 면죄부만 준 셈”이라고 꼬집었다.
아울러 일본 집권 자민당이 청일전쟁(1894~1895년) 이후의 역사를 검증하는 ‘역사를 배우고 미래를 생각하는 본부’를 지난 29일 정식 발족시킨 것도 한·일 정상회담이 무용했음을 보여줬다. 일본 우익들의 역사 수정주의에 입각한 역사 재해석을 시도할 것으로 보이는 이 본부는 위안부 문제도 하나의 테마로 다룰 예정이다.
4강 외교의 마지막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한·러 정상회담에서는 지극히 원론적인 수준의 논의만 이뤄졌다. 박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에게 “북한이 올바른 현실 인식을 갖고 핵문제에 대한 입장을 재고해 의미있는 비핵화 대화가 재개될 수 있도록 러시아의 적극적인 역할을 당부한다"고 말했다. 이어 "한반도 평화통일 환경을 조성해 나가는데 러시아의 적극적인 협조와 지지를 요청한다"고도 덧붙였다. 이에 푸틴 대통령은 "북핵 불용 원칙 하에 외교적 방법을 통한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 함께 노력해 나가겠다"고 답했다.
이에 대해 정세현 상임대표는 “남북관계도 제대로 못 이끌어가는 한국이 러시아에 통일 문제를 얘기한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논평했다. 이어 그는 “박 대통령은 3일 체코에 가서도 체코·폴란드·헝가리·슬로바키아의 성공적인 체제 전환을 언급하며 ‘한반도 통합 과정에도 의미 있는 교훈을 줬다’고 말했다”며 “북한 입장에서는 흡수통일을 염두에 둔 체제 대결적인 발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황준호 기자 jhwang7419@etomato.com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30일 프랑스 파리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이로써 박 대통령은 9월 초부터 중국·미국·일본·러시아 순으로 이어진 하반기 주변 4강 정상외교를 마쳤다. 사진/로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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