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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유승민의 ‘발심(發心)’
2015-07-02 13:55:56 2015-07-02 13:55:56
박근혜 대통령의 ‘세기적 강공’이 실패로 돌아가는 분위기다. 적어도 유승민 원내대표를 ‘감쪽같이 찍어내고’ 새누리당 지도부를 친박으로 다시 세우려는 청와대의 플랜A는 실패로 돌아갔다. 대통령이 메르스 같은 초대형 현안을 외면하고 유 원내대표를 직접 겨냥한 정치적 모험을 단행했지만, 상황은 박 대통령의 뜻과 정반대로 흐르는 양상이다. 플랜B는 있을까. 기껏해야 검찰의 사정카드 정도이지 않을까?
 
설상가상으로 정의화 국회의장이 대통령 거부권 행사로 되돌아온 국회법 개정안을 6일 재의에 붙이겠다고 선언함으로써 유 원내대표는 또 한 장의 새로운 카드를 쥘 수 있게 됐다. 최악의 경우 사퇴할 명분을 갖게 된 것이다.
 
물론 유승민이 당장 원내대표직을 내놓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청와대의 잇단 압박에도 별 위협을 느끼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배신의 정치를 말한 박 대통령의 지적에도 동의하지 않는 분위기다. 허리를 90도로 굽혀 사과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시간이 자신의 편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측근들의 전언에 따르면 대통령에게도 할 말은 하는 것이 진정한 로열티라는 평소 소신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게다가 유 원내대표는 배신은커녕 잘못한 게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정부의 중점추진 과제였던 공무원연금개혁법을 처리한 것을 성과로 생각한다. 유 원내대표는 메르스와 가뭄으로 긴급편성된 추경예산안 처리에도 공을 들이는 모습이다. 아직은 사퇴할 뜻이 없다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다.
 
6월24일부터 30일까지 1주일 동안 유승민의 SNS 언급량은 11만건에 이르렀다. 이는 유승민 주간 언급량사상 최대 규모다. 국회법 언급량인 8만건보다 더 많다. 여론도 움직이고 있고 지역구인 대구지역에서도 일방적으로 밀리지는 않는 양상이다. 세계 원내대표사상 이렇게 집중적인 조명을 받은 이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다.
 
박 대통령의 뜻과 정반대로 유 원내대표는 조용한 정책통에서 전국적 정치인으로 성장하고 있다. 대통령과 친박 의원들이 압박을 가하면 가할수록 유승민을 중심으로 한 구심력은 더욱 강력해질 수밖에 없다. 정두언, 이재오 의원뿐 안니라 재선의원 20여명이 유승민을 적극 옹호하고 나선 것도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나아가 다가오는 총선에서 유승민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당내 여론은 그를 버틸 수 있게 하는 강력한 힘의 원천이다. 국회의원의 한결같은 바람은 선거에서 이기는 것이다. 박 대통령이냐 유 원내대표냐를 선택하는 기준도 다가오는 선거에서 누가 더 필요할 것인가 하는데 모아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이번 박 대통령의 작심발언은 총선 공천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한 권력투쟁 성격을 갖는다. 하지만 대통령의 암묵적 지원에도 불구하고 대표적인 친박 인사인 서청원, 황우여, 이주영 등이 당내 선거에서 맥없이 밀렸다. 친박계가 원내대표 사퇴를 위한 의원총회조차 열지 못하는 이유다.
 
명분이 약한 싸움은 시간이 적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번에 나온 박 대통령의 ‘의회 하이킥’은 명분이 약한 정도가 아니라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 도전으로 간주되고 있다. 대통령이 의원들의 투표로 선출된 여당의 원내대표를 나가라 마라 하는 것은 독재정권에서나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친박계 의원들도 메시지조차 없는 공세를 벌이고 있다. 메시지라고 해봐야 유 원내대표가 대통령하고 사이가 안 좋으니 그만 두라는 것 정도다.
 
유 원내대표가 평소 해 온 말 가운데 ‘발심(發心)’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일을 하기로 마음먹는다는 뜻이다. 2012년 9월 야권의 유력 대선주자인 안철수 의원을 두고 “발심이 없다”고 비판한 것이 화제가 됐었다. 유 원내대표는 2013년 1월 박 대통령의 당선자 시절 첫 인사에 반기를 드는 발심을 보였다. 대통령직인수위 대변인에 언론인 윤창중 씨가 임명되자 “그는 너무 극우다. 당장 사퇴하는 게 맞다”고 비판한 것이다. 증세를 말한 교섭단체 대표연설은 야권을 포함한 폭넓은 지지를 얻은 또 한 번의 발심이었고, 사드 배치 이슈를 선점해 친미주의자로서의 안보 이미지를 강화한 것도 대통령의 심기를 거스른 일이었다. 경제에서는 진보 확장성을, 안보에서는 보수 결집을 꾀하는 두 개의 정치적 행보를 이미 시작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유 원내대표를 대충 눈치나 보는 정치인으로 보면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대충 눈치나 보는 청와대 참모들의 안이한 상황인식이 이런 사고를 쳤을 가능성이 크다. 소통이 없는 일방적 리더십은 때로 눈치꾼 참모들의 과격함에 이끌리게 된다. 마치 적을 소탕하는 듯한 대통령 메시지는 누가 썼을까. 표현 하나하나에 감정이 실려 있는 이 메시지는 사실상 두려워서 크게 떠드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미국 대선에 출마한 힐러리 클린턴은 그의 자서전 ‘힘든 선택들’에서 자신에게 겨누어진 비판을 어떻게 대할지 정리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비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되 개인감정을 싣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의 메시지엔 개인감정이 강하게 실렸고 거기서 이미 진 싸움을 시작한 셈이다. 유승민은 지금 일부 야당 지지자들까지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있다.
 
유승찬 스토리닷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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